▲ 『홍재전서』 권56, 「송두신문(送痘神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 비전성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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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년 9월 22일에 정조는 옹주[淑善翁主, 1793-1836]가 두창(痘瘡)에 걸린 것을 발견했다.
며칠 전부터 체한 것 같은 증세로 열이 나던 옹주는 이날 손발에 반점이 돋았다. 정조는 즉시 방외(方外)의 두창 전문 의원을 불러 진찰하게 하고, 이문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같은 달 25일부터 옹주의 볼에 구슬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곪을 기미가 보였다. 그리고 30일부터 딱지가 떨어지기 시작해 마침내 나았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는 궁궐 내부에도 두창의 전염에서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궁궐에 거처하는 왕이나 왕후, 그리고 왕세자가 두창에 걸렸다가 회복하면 조정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당시 연회의 모습은 「두후평복진하도(痘候平復進賀圖)」를 통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위 옹주의 사례에서 흥미로운 것은 정조가 거행한 ‘두창신(痘瘡神)을 보내는 의식’이다. 이는 무당의 마마 배송굿과 비슷하지만 무당은 보이지 않고, ‘마마신을 보내는 글[送痘神文]’을 지어 간단한 예식과 함께 신을 전송하는 것이다.
정조가 마련한 배송 의식을 살펴보면 먼저 볏짚으로 만든 마마신에게 헌주(獻主)와 집사자가 절하고 술을 바친 후 신을 받들고 상마소(上馬所)로 나와 말에 태웠다.
그리고 선독관(宣讀官)이 무릎을 꿇고 송신문(送神文)을 읽은 후 말을 인도해 통화문 밖에 나아가 절을 하고 보냈다.
이날 송신문은 정조가 직접 지었다. 글에서 정조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신도 사랑하였도다”라며 마마가 옹주에게 들어와 두 볼에 반점이 돋고, 구슬 안에 고름이 맺히고 짓무르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했다.
그리고 떡을 빚고 악기를 두드리며 술을 권해 보내는 과정을 적은 후 떠나는 신에게 자손의 장수와 창성(昌盛)을 기원하며 글을 마쳤다.
두창의 마마신은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신으로 숭상할 정도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신이었다. 그러나 두창에 대한 반응을 두려움과 회피만으로 설명하긴 어렵다.
김매순(金邁淳)은 「송두신문(送痘神文)」에서 마마신이 약한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고, 유약한 사람을 굳세게 만드는 공로가 있다고 했다.
김매순을 비롯한 유자들이 두창을 신으로 인정한 까닭은 그것이 “사람됨(爲人)”의 관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현석은 이를 “옥성지공(玉成之功)”이라 했다. 옥으로 만들어 주는 공로란 말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닥친 질병을 의학적 대상으로만 간주하지 않고 자신의 실존 속에서 해석한다. 질병에 걸린 사람뿐 아니라 질병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질병이 걸렸을 때 가장 단순한 물음, 왜 이런 질병이 ‘하필’ 나에게, 내 가족에게 닥쳤는가에 대한 답을 의학에서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에게 주어진 질병을 의미론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면 이겨내지 못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고운 피부에 물집이 생기고 딱딱하게 변한 내 얼굴, 또는 사랑스러운 자식의 얼굴을 바라보며 성인(成人)으로 가는 길목이라 인내하며 참았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우리는 이제 코로나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미지의 변화를 겪고 있다.
마음껏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살갑게 만나던 지난날이 유년의 추억처럼 그립다. 이 변화가 실직과 파산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
질병에 걸리는 것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우리를 어렵게 만든다. 무력감에 빠지는 이때 “코로나 바이러스 신(神)”을 보낼 그날을 꿈꾸며 그가 나에게 끼친 공로가 무엇인지를 헤아리며 하루하루를 인내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