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문화유산 천림산 봉수지
예부터 큰 목소리로 말을 하고 북을 치거나 나팔을 불며, 파발마를 띄워 소식을 전하는 행위는 모두 정보전달을위한 통신방법이었다. 다른 통신 방법에 비해 빠른 정보 전달을 위한 통신수단이 있었으니 바로 봉수다. 봉수(烽燧)란 횃불(烽)과 연기(燧)로 변방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에 알려 이를 대비하는 통신제도로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이리 똥을 이용해 연기를 피워 신호를 전달했다. 평상시 변방의 위험이 없을 때에는 한줄기의 신호를 올렸기 때문에 평안화(平安火)라 불리기도 했다. 비가오거나 흐린 날에는 화포나 북, 나팔 또는 깃발로 알리거나 봉수군이 직접 달려가서 보고했다. 그 중요한 봉수가 우리 고장에도 있었으니 천림산 봉수다. 청계산자락인 수정구 금토동 산35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179호>다. 경기 감사가 관리감독 맡을 만큼 중요해 ‘봉수는 서울 목멱산(남산)의 경봉수, 바닷가의 연변봉수, 내륙의 내지봉수로 구분되며 세종 때에 다섯 개의 직봉(直熢)노선과 그 사이를 연결하는 간봉(間烽)으로 정비되어 고종 31년(1894)까지 유지됐다. 천림산 봉수는 우리나라 다섯 개의 직봉 노선 가운데 두 번째 노선의 마지막 전달 봉수로 부산 다대포진 응봉(鷹峯)에서 시작돼 용인의 석성산 봉수의 신호를 전달받아 서울의 목멱산 봉수에 전달했다. 1846년에 홍경모가 편찬한『중정 남한지(重訂南漢志)』에 “봉군 25명, 보75명”이라는 기록을 통해 봉수군의 인원은 25명으로 5명씩 한 조를 이뤄 5교대로 근무했고 이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75명의 인원이 별도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지역의 봉수는 그지역의 수령이 관리책임을 맡았지만 천림산 봉수는 경기 감사가 직접 관리감독을 맡을 만큼 중요한 봉수였다. 천림산 봉수는『세종실록 지리지』(1454)에 최초로 기록돼 있고 다른 지역의 봉수보다 잔존상태가 매우 온전하게남아 있는 조선전기 축조물로 평면 형태가 장반타원형으로 둘레는 82.5m이며 하단부 둘레는 85m가량이다. 서울남산 쪽을 향한 5개의 연조(굴뚝)와 방호벽, 담장시설, 계단식 출입시설, 봉수군의 거주와 비품 등을 보관하기 위한 부속 건물터가 확인됐고, 방호벽은 동서 길이 33.8m, 남북 길이 12m, 내부면적 333㎡(약 100평)로 내지봉수의 구조를 온전히 갖추고 있는 봉수다. 천림산 봉수, 복원의 의미 천림산 봉수의 위치가 세상에 알려진건 금토동 원주민 윤효상 씨에 의해서다. 광복 50주년이 되던 1995년에 전국봉화제가 열렸다. 이때 성남문화원이 제1회 봉화제를 개최했고, 1996년 제2회 통일기원 봉화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윤효상 씨가 제보했다. 1999년 10월 1일, 전국 최초로 봉수관련 학술회의가 성남문화원 주최로 열리게 됐다. 정확한 문헌고증을 통해 학술적 가치를 규명하고 고증을 토대로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 의해 정밀지표조사 및 봉수터와 건물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천림산 봉수터 아래편은 과거 부산에서 시작된 봉수의 신호를 받아 서울의 목멱산에 전달했던 것처럼, 고속국도 제1호인 부산과 서울을 잇는 경부고속도로로 예나 지금이나 교통 통신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변방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에 알려이를 대비하고 나라의 안전을 지켰던 통신수단 봉수는 우리가 지켜야할 소중한 국방 문화유산이다. 현재 전국의 봉수 실태조사와 문헌기록 조사를 통해 성남문화원이 복원사업을 추진 중이다. 천림산 봉수가 원형대로 보존·복원돼 서울 남산을 향해 봉수를 올려 유형문화재로서 그 가치를 증명하고 역사교육의 체험학습장이 된다면 우리 고장의 자랑이 아닐까. 금토동(金土洞)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대왕면 금토동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현동과 둔토리를 병합해 첫 글자를 따서 금토리로 불리다가 1973년 7월, 시 승격에 따라 금토동으로 됐다. 자료제공|성남문화원 도움말|윤종준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조민자 기자 dudlfdk@hanmail.net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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