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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윤영의)가 기억하는 ‘청계산 호랑이’ 윤치장 의병장

“할아버지는 금토동 일대에서 윤 대장으로 불렸어요”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1/07/23 [12:47]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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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치장 의병장의 손녀, 윤영의 어르신  ©비전성남

 

성남시와 성남문화재단이 기획한 ‘독립운동가 100인 웹툰 프로젝트’의 주인공 100인 중 한 명인 윤치장(재옥在獄, 1876~1971년) 의병장. 광복절을 맞아 그의 손녀 윤영의(85‧구미동) 어르신을 만나봤다.

 

“할아버지는 신체가 좋으셨고, 90세에 쌀가마니도 번쩍 들 정도로 힘이 세셨어요.” 청계산 호랑이라 불렸던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며 어르신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 할아버지는 8세에 한문서당에 입학해서 19세에 소학, 효경, 주역까지 한문 전 과정을 수료했다고 해요. 글도 잘 쓰시고, 떡도 잘 써시고, 특히 채를 아주 잘 써셔서 김장할 때 자주 도와주셨어요.”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당시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금토리 94) 태생인 윤치장 의병장은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에 분개해 광주군 일대에서 총기로 무장한 7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 기병대와 전투를 벌였다.

 

그는 양주 일대에서도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으며 군량미와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08년 10월경 체포됐다. 이로 인해 교수형을 언도 받았으나 이후 징역 15년 형으로 감형됐다.

 

“내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는 금토동 일대에서 윤 대장으로 불렸어요. 광주에서 밤낮으로 일본 군인과 싸웠다는데, 할아버지는 우리 쪽 사람이 많이 다치지 않았으면 이긴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일본군의 총에 맞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 돌아가실 때까지 왼쪽 얼굴의 고름을 짜내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어르신은 할아버지와 같이 살지는 못했다고 한다. “매일 집을 비우셨고 어쩌다 할아버지 댁에 가면 쌀을 싸주시곤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13살 때 할아버지가 수감되셨는데, 22살 때 결혼한 뒤에 사형선고를 받으셨던 할아버지가 풀려나셔서 마을 사람들이 며느리가 잘 들어와서 그렇단 말들을 했다더군요. 나중에 들으니 일본 국왕이 즉위하고 특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가 다시 15년 언도를 받고 복역 중 1923년에 풀려났다고 해요.”

 

어르신은 그 시절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어갔다. “할아버지는 경안장 우시장에 다니시기도 했고, 서울로 가서 가게를 열고 살림을 하셨다고 해요. 아마 그때도 독립운동을 하시느라 그랬던 것 같아요. 그 후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짓다가 1971년 95세로 돌아가셨어요.”

 

윤치장 의병장은 대한민국 건국에 헌신한 공훈이 인정돼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윤치장 의병장의 금토동 묘는 증손자 윤교상 씨가 어머니(윤치장 의병장의 손부) 남영우(86) 어르신과 함께 돌보고 있다.

 

현재 우리가 당연한 듯 누리는 것들은 100여 년 전 선조들이 목숨 걸고 내 나라 내 이웃을 지키고자 했던 고귀한 희생 덕분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그 고매한 정신만은 우리 가슴에 깊이 남을 것이다.

 

▲ 윤치장 의병장의 친필<계자제시>(자제들에게 준 경계의 글)  ©비전성남

 

▲ 윤치장 의병장 주민등록증 사진   ©비전성남

 

▲ 윤치장 의병장의 건국훈장(독립유공 부문)   ©비전성남

 

취재 이화연 기자  maekr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