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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조선시대 전염병과 전몰처(戰歿處)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1/08/25 [10:44]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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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0년(경술년, 현종 11)과 1671년(신해년, 현종 12)에 발생했던 경신대기근(庚申大飢饉)은 임란과 호란의 두 전쟁만큼이나 참혹했다. 연이은 기온 저하로 한발, 홍수, 풍해, 여역, 황해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재난이 닥쳐 1671년 한 해 동안 사망자수가 8만 8,150명이었다.

 

이 숫자는 중앙에 보고된 것만을 합계한 것이므로 실제 사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아 거의 백만에 이르렀다. 당시 재난의 극단이 전염병이었다. 몇 해 전부터 기근으로 인해 영양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국적으로 유행한 여역은 치명적이었다.

 

조선시대 전염병이 발생하였을 때 주로 거행했던 여제(厲祭)는 여귀(厲鬼)를 위한 제사였다. 여귀는사람에게 횡포를 부리는 ‘강포한 귀신’이다. 이들은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비명횡사(非命橫死)한 원혼이다.

 

이들을 ‘무사귀신(無祀鬼神)’이라고도 부르는데 그들의 강포함이 본래의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제사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불운한 처지’에서 비롯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사는 숭배와 감사라기보다 ‘기억’과 ‘위로’의 행동양식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수도의 한양을 비롯해 각 군현에는 여단이 있어서 일 년에 3번 무사귀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주었다. 경기 광주부의 경우 여단은 남한산성의 북문 내에 있었다. 정기적 제향 외에도 전염병이 돌 때면 전염병이 그들의 빌미에 의한 것이라 여겨 여제를 지냈다.

 

1671년 4월에 정부 서울과 지방에 여제를 설행했다. 당연히 여단에서 거행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여제의 장소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중정(重訂) 남한지』 표지와 단묘(壇廟)의 내용     ©비전성남

 

당시 여제의 장소는 한양 북교의 여단을 비롯해 민충단, 험천, 쌍령, 금화, 토산, 강화, 진주, 남원, 금산, 달천, 상주, 원주, 울산 등의 14곳이다. 이곳이 여제의 제단으로 선정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한양 북교 여단을 제외한 나머지 13곳은 모두 전쟁과 관련된 전몰처(戰歿處)였다.

 

민충단은 임란 때 조선에 왔다가 전몰한 명나라 군사를 위로하려고 만든 제단이었다. 진주, 남원, 금산, 달천, 상주, 원주, 울산은 임란 때 주요 격전지였으며, 특히 우리 병사들이 패전해 많이 죽었던 곳이다. 반면 험천, 쌍령, 금화, 토산, 강화는 병자호란 때 우리 병사들이 패전했던 장소다.

 

현재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지역인 험천은 병자호란때 충청감사 정세규(鄭世䂓)가 남한산성에피신한 임금을 구하기 위해 수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왔다가 청군에게 패했던 곳이다.

 

당시 전투에서 죽은 시체가 험천에 쌓이고 그 피가 수십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광주의 쌍령 역시 경상도에서 상경한 근왕군이 청군에 패배한 장소였다. 그 외 지역 역시 우리의 수많은 병사들이 패전으로 죽었던 곳이다.

 

이러한 전몰처들은 전쟁 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졌다. 그러나 가뭄과 여역의 재난은 다시 이들을 소환했다. 이후 편찬된 『광주부읍지』나 『중정 남한지』에서도 험천과 쌍령의 기우제단을 그 유래와 함께 소개했다.

 

전염병은 기다림의 싸움이다. 조선시대 사람들도 여역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 접촉을 멀리하는 피방이라 여겼다. 몸이 고립될수록 기억은 더 왕성해지는 걸까? 전염병은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을 기억해냈다. 패전해 버려졌던 가련한 시신과 그들의 영혼이었다.

 

누구의 시신인지도 알 수 없는 그 무정형의 슬픔이 전염병으로 인해 다시 기억된다. 그들의 영혼을 불러내어 산자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의 처지를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폭발할 것 같은 곤궁의 시기에 타자의 아픔을 위로하면서 서로를 치유했다.

 

▲ 이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비전성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