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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들이 돈을 벌기에 제일 쉬운 게 장사였어요"

[광주대단지시절을 이야기하다] 성호시장 노점에서 채소 장사로 광주대단지 시절을 이겨낸 어머니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1/08/25 [11:22]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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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벌어야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연필이랑 공책도 사줄 수 있으니 어쩌겠어요.”

 

광주대단지 시절 서울 구로동에 살다가 성남으로 이사 온 안종숙(74) 어르신 가족의 성남살이는 시고모 댁 더부살이로 시작됐다. 사람 좋기로 소문은 났지만 경제력이 약한 남편을 대신해 다섯 살 된 작은 아이를 시고모께 맡기고 성호시장 앞 단대천 뚝방에 자리를 잡고 채소를 펼쳤다. 하루 장사를 하면 단돈 몇 천 원이라도 벌 수 있으니 두 아이 배곯지 않을 수 있고, 학용품도 사줄 수 있으니 엄마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엄마들이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들 먹이고 입힐 생각에 장사만 잘되면 더워도 덥지 않았고 추위도 춥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당시 성호시장 옆으로는 도매시장이 있었고, 뒤로는 뒷시장이 형성돼 있었다. 노점 행상을 하는 어머니들 대부분은 그곳 도매시장에서 물건을 떼다가 단대천 뚝방이나 일반 점포 처마 밑에서 장사를 했다. 단대천 뚝방에는 채소, 과일, 의류, 신발, 포장마차에선 어묵, 튀김, 곤달걀 등 온갖 물건이 판매되고, 성호시장을 찾는 사람만큼 장사꾼도 많았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다들 그렇게 사는 세월이었고, 자식들 배부르게 먹일 수만 있다면 힘들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70년대 후반인가? 단대천 뚝방에 판자로 지어진 가건물 점포가 길게 늘어서 지어졌어요. 비록 가건물이긴 하지만 노점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에서 장사를 하게 됐지.”

 

김장철이면 성호시장엔 진풍경이 펼쳐졌다. 트럭 한가득 실려 온 배추, 번호표를 단 리어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주문받은 배추를 실어 나르기에 바빴다. 이 집이나 저 집이나 먹을 게 충분하지 않은 시절이니 배추 100포기, 150포기 김장은 기본이었다. 육체적으로는 김장철이 가장 힘들지만, 장사가 잘되니 정신적으로는 제일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다.

 

“고생하며 살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장사해서 자식 둘 먹이고 입히고 대학 공부까지 시켰으니 아주 잘 산 거 아닌가.”

 

대부분 못 입고 못 먹던 시절이었지만 어머니는 자녀를 배곯지 않게끔 키웠다고 한다. “낮시간을 장사에 쏟았다면 밤시간은 집안 살림에 아이들 건사까지, 녹초가 되는 줄도 모르고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며 “자식 둘을 키워야 하는 엄마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고 말하는 안종숙 어머니다.

 

“어디 가든 적응하기 나름이지만 당시의 성남은 없는 사람들이 살기엔 좋은 도시였어요.”

 

처음 들어본 광주대단지 시절에 대한 긍정적 반응이다. 이유를 물으니 “지금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상인들의 힘듦이 광주대단지 시절의 고단함을 능가한다”고. 채소 장사로부터 이어온 용이네 과일가게의 한산함을 느끼며, 코로나와 함께 어머니의 힘듦이 싹 물러가길 바라본다.

 

취재 윤해인 기자  yoonh110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