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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AI시대의 인간정체성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1/09/29 [09:58]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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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 사이보그 주연, 2019년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의 포스터   ©비전성남

 

구로망기(鷗鷺忘機)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바닷가에서 갈매기와 해오라기가 자유롭게 노는 것을 보며 고단한 세상일을 잊는다는 뜻으로, 자연 속에 은둔하며 속세의 일을 잊고 사는 한가로운 삶을 이르는 말이다.

 

곤궁했던 옛 선비들이 추구했던 멋진 인생의 한 모습이지만, 물질적 풍요가 넘쳐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사는 현재에는 실현 불가능한 꿈이다.

 

지구 위에 AI의 눈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근본적으로 없다.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인공위성과 도시곳곳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들은 우리의 삶을 감시한다.

 

스스로 자동차에 카메라를 달아 타인과 자신의 행동거지를 감시하고, 거대자본에 자발적으로 사용료를 납부하고 온종일 스마트폰을 이용하며 자신의 삶을 감시의 연결망 속에 구속한다. 분야별 고도화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모든 과정에 <AI의 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다.

 

AI, 즉 인공지능(人工知能, Artificial Intelligence)은 인간이 개발한 기술의 하나일 뿐이었다. 인간은 삶을 보조하기 위한 도구로써 컴퓨터를 이용했고, 그 성능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사고나 학습 등 인간의 지적능력을 컴퓨터에 부여했다. 그런데 이제는 인공지능컴퓨터가 인간의 지적 능력을 위협할 정도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2016년 3월 당시 세계 최고의 실력을 보유한 한국의 이세돌 9단은 ㈜구글 산하의 <딥마인드>라는 회사가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 5차례 대국을 두었다.

 

결과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4:1로 <알파고>가 승리했다. 그나마 이세돌 9단은 <알파고>와 겨뤄서 1승을 거둔 유일한 인간이다. 이미 인간의 능력으로 <알파고>를 이길 수 있는 단계가 지난 것이다.

 

사고나 학습 그리고 진단과 처방 등의 분야에서 인공지능은 이미 인간보다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AI로 대표되는 기술 융합의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물리적 공간>과 <생물학적 공간>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있다.

 

사람보다 더 뛰어난 매력을 발산하는 사이보그(cyborg), 하늘과 땅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목표를 장악하는 드론(drone), 김치냉장고나 밥솥에 설치돼 요리사보다 뛰어난 맛을 만드는 사물인터넷 등을 볼 때,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인공지능의 편리함이 없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지경에 와 있는 것이다.

 

이제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유 능력을 넘어서는 시대를 살아가게 될 우리의 처지에 대해 자각할 때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문명은 인간(Human being)과 기계(Machine)의 영역이 모호해지는 단계를 넘어 서로 만나 합일하는 특별한 지점(Singularity)으로 가고 있다. 이다음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어 자발적으로 진화하는 단계일 수 있다. 

 

인류는 기계를 만들어 사용하며 점진적으로 문명을 발전시켰는데 이제는 스스로 만든 기계로부터 소외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기계에 삶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는 어색한 지경에 당면해 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발전하는 것이겠지만 그건 그냥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본질과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고 사색하며 성찰하는 과정이 있어야 인공지능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 

 

기계와 다른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그 본질은 무엇인가? 동서고금의 철학 속에 여러 답이 있지만, 우리 전통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답 중 하나는 인의 예지신(仁義禮智信)이다.

 

생명을 불쌍히 여겨 사랑하는 마음,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이치에 따르며 겸손히 양보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 신의를 지키려 실천하는 굳건한 마음 등이 인간의 본질과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라는 것이다.

 

이런 마음과 실천이 없으면 사람이 아닌 ‘것(things)’이다. 기계나 사물은 인의예지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기계와 다르다. 인간은 인생의 행로에서 기쁘게 웃기도 하지만 괴로워하고 불안해하는 실존적 존재다. 우리는 아름다움과 선한 삶을 추구하는 근원적 지향성을 지니고 있으며, 희생과 봉사와 자비를 통해 자아를 실현하려는 도심(道心)도 있다.

 

아무리 AI가 발전했다 해도 인간의 정체성과 실천적 삶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성찰하며 산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라는 파도 속에서 자아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한 인생의 바른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김백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비전성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