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고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얼굴을 그리는 일은 삽화가가 친구를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이기도 합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람에게 다가가려고 애쓰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얼굴에 인간성이 드러나서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람을 만나면 자연스레 얼굴에 먼저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의 성격과 감정과 생각들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지만 말이지요).’
- 『안녕, 반짝이는 나의 친구들』의 그림 작가 파비안 네그린
『안녕, 반짝이는 나의 친구들』은 조 마치, 삐삐, 보바리 부인 등 살던 시대와 성격은 다르나, 현실이 정해놓은 틀과 한계를 벗어나 자신 본래의 모습으로 살고자 했던 소설 속 주인공 스물두 명을 모은 책이다.
파비안 네그린(Fabian Negrin)은 주인공들의 특색을 저마다 다른 기법으로 살려냈다. 생생하게 때론 강렬하게 다가오는 주인공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전시가 현대어린이책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얼굴》 展은 미술사에서 가장 오래된 주제라는 ‘얼굴’을 새롭게 표현하는 현대미술 작가(갑빠오, 마크 최, 롱빈 첸, 서한겸, 신승백, 김용훈, 우정아, 천경우)과 일러스트 작가(파비안 네그린, 스베틀란 유나코비치, 안드레 레트리아)의 작품 100여 점을 전시한다.
회화, 조각, 설치, 일러스트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얼굴의 시간, 표정, 조합, 이름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감상할 수 있다.
우정아 작가의 설치작품 <무제>는 바람과 천을 재료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변해가는 인간의 얼굴을 형상화했다. 숨을 들이마시는 얼굴에서는 아이를, 숨을 내뱉는 얼굴에서는 노인을 만난다.
재봉틀이 자리잡은 작업테이블은 현재진행형으로 전시 기간 중에 우정아 작가의 새로운 얼굴 작품이 전시될 예정이다.
서한겸 작가는 <아이 연작>에서 실제 얼굴에서 볼 수 없는 많은 색과 형태로, 아이 마음속 불안과 초조함을 표현했다.
작품을 가득 채우는 큰 얼굴과 또렷한 눈, 코, 입에서 마음속 감정과 에너지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노란색 벽면에는 인간은 볼 수 있으나 인공지능은 인식할 수 없는 얼굴이 전시됐다.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는 미디어 아티스트 그룹 신승백 김용훈의 <넌페이셜 포트레이트 Nonfacial portrait>는 눈, 코, 입이 겹쳐진 얼굴, 선으로만 그린 얼굴 등 기술이 아닌 인간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얼굴을 그려 인간만의 시각적 영역을 찾는 시도를 보여준다.
초상화 옆에 설치된 스마트폰에서는 얼굴 인식 시스템을 따돌리며 초상화를 완성하고 있는 작업이 재생되고 있다. 관람객들은 얼굴 인식 카메라가 설치된 워크숍 공간에서 넌페이셜 포트레이트 작업을 해 볼 수 있다.
이어지는 공간에서는 <붓다 Budda>의 인자한 얼굴이 관람객들을 반긴다.
두 눈이 머금은 감정은 무엇일지 궁금해지는 <아인슈타인 Einstein>까지 롱빈 첸의 조각 작품이다.
롱빈 첸은 버려지는 책, 잡지, 전화번호부 등으로 동서양의 유명 인물을 조각해 세계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적 갈등, 소비, 낭비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전시실 2에서는 해외 일러스트 3인의 작품을 전시한다. 크로아티아의 스베틀란 유나코비치(Svjectlan Junaković)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까지의 유명한 초상화를 인물에서 연상되는 동물의 얼굴로 바꿨다.
친구의 특징을 별명으로 붙이듯 <동물의 초상화를 위한 위대한 책 Great book of aninmal portraits>은 초상화를 동물의 얼굴로 재미있게 풀어냈다.
그 반대편에는 파비안 네그린이 그린 문학작품 속 11명의 얼굴이 전시됐다.
익숙하지만 낯선 얼굴에 질문이 샘솟는다.
그 옆으로 머리, 눈, 코, 입, 옷 스타일까지 닮은 듯 다른 16명의 얼굴이 등장한다. 안드레 레트리아(André Letria)의 작품이다.
3등분 된 얼굴이 그려진 플립북을 넘기면서 각기 다른 얼굴들의 이름과 사연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실 2에는 전시 작품들이 실린 책이 준비돼 감상의 재미가 배가 된다.
마크 최는 종이와 나무로 제작된 전통 탈을 덴마크의 친환경 재료인 크바드라트(Kvadrat)로 재해석했다. 전통 탈의 익살과 해학이 다른 촉감으로 다가온다.
시야가 흐려진 듯 윤곽이 또렷하지 않은 사진들은 천경우 작가의 <여왕 되기 Being a queen>이다. 사진 속 주인공은 실제 여왕이 아닌 여왕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남을 흉내 내려던 것이 오히려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 옆에 설치된 비디오 작품 <A Naming Game>에서는 아이들이 한 명씩 나와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거울을 들여다보듯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얼굴들은 무표정부터 퉁명스러움까지 다양하다. 관람객들은 작품 옆에 설치된 모니터 속 본인을 바라보며 자신의 이름을 불러볼 수 있다.
마지막 전시는 갑빠오 작가의 조각작품 <아무도 나를 모른다 Nobody knows me>. 백여 명의 알 듯 모를 듯 미묘한 얼굴들이 회색빛 거울에 비친다.
수많은 색과 형태로 인간 군상을 표현하는 갑빠오 작가는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무관심부터 즐거움이라는 복잡한 감정들을 느끼게 한다.
≪얼굴≫展은 전시장에 얼굴의 형태를 탐구해 보는 ‘얼굴 실험실’을 마련했다. 눈, 코, 입 조각 퍼즐로 얼굴의 표정을 조합하는 ‘내 마음대로 얼굴 퍼즐’, 사람과 동물의 얼굴이 표현된 오브제로 관찰하는 ‘얼굴 오브제 드로잉’, 거울 앞에서 형태가 왜곡되는 얼굴을 마주 보는 ‘올록볼록 거울 앞에서’ 등 다채로운 시도로 얼굴을 느낄 수 있다.
전시장 입구에 준비된 ‘전시 감상 가이드북’에는 자세한 설명과 감상법, 작품 앞에서 바로 해 볼 수 있는 활동이 들어 있다.
전시와 연계된 <엉뚱 발랄 눈, 코, 입!>, <1000가지의 얼굴>, <MY FACE BOX> 등의 예술 교육프로그램도 4세~초2 연령대별로 열리고 있다. 프로그램은 홈페이지 www.hmoka.org 에서 내용 확인과 신청이 가능하다.
현대어린이책미술관 관계자는 “사람들이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돌아봤으면 합니다. 이번 전시가 우리가 잠시 잊고 있던 얼굴의 다양한 생김새, 표정, 감정의 소중함을 되찾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 현대어린이책미술관 ≪얼굴≫展 * 전시기간: 2021. 9. 17. ~ 2022. 2. 6 * 장소: 현대백화점 판교점 5층 현대어린책미술관 전시실 1,2 ☏031-5170-3700 * 입장료: 6천 원(성인, 아동 동일) * 개관시간: 오전 10시 ~ 오후 7시(입장마감 오후 6시) *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전일과 당일
취재 전우선 기자 folojs@hanmail.net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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