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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중천의 십이지신 다리를 아시나요?

특별기고 정헌목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6/02/14 [16:37]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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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신도시는 중심부를 가르며 남북으로 이어진 경부고속도로를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의 경관이 판이하게 다르다.

 

경부고속도로 동쪽의 동판교 지역(삼평동, 백현동)은 신분당선 판교역과 그 주변의 판교테크노밸리를 중심으로 업무지구와 상업공간 위주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서쪽의 서판교 지역(판교동, 운중동)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운중천을 따라 지어진 고급 단독주택과 아파트 단지로 구성된 풍경을 보여준다.

 

특히 서판교 일대는 운중천을 중심으로 잘 조성된 산책로와 더불어 높은 녹지 비율 덕택에 상당히 쾌적한 도시 경관을 제공한다.

 

▲ 운중천에 놓인 보행 전용 다리들이 특징적인 서판교 일대의 풍경(필자 직접 촬영  © 비전성남


특히 운중천을 따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건설된 수십 개의 교량들은 판교신도시가 그야말로 다리의 도시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인상을 준다. 하천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와 바로 연결되는 보행 전용 다리 대다수가 서판교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돼 시민들의 편의와 독특한 경관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보행 전용 다리마다 양 끝에 눈에 띄는 석재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는 사실이다얼핏 보기에 단순한 장식처럼 보이지만, 조형물과 인근 바닥을 자세히 보면 그 의미를 설명하는 안내문을 발견할 수 있다. ‘토끼()’, ‘()’, ‘()’, ‘()’, ‘()’, 바로 십이지신이다. 도대체 이 다리들에 왜 십이지신이 붙어 있는 것일까?

 

그 유래는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판교신도시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판교신도시의 개발 주체인 한국토지공사(현재의 LH)는 과거 판교 일대에서 행해졌다고 전해지는 정월대보름 다리밟기 놀이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고자 이런 테마 교량을 계획했다.

 

신도시에 새로 입주하는 주민들이 각 띠에 해당하는 다리를 오고가면서 한 해가 평안하고, 건강을 기원하는 문화 이벤트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거였다.

 

▲ 다리의 바닥에 적힌 설명 중 하나 (필자 직접 촬영)  © 비전성남

 

이런 도시계획에 의해 쥐, , 호랑이, 토끼 등 십이지신의 차례대로 각 동물을 뜻하는 조형물이 운중천의 보행 전용 다리에 설치됐다. 주로 다리의 양 끝 지점에 해당 동물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놓은 정도라서 조형물만 봐서는 그 의미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그래서 아마 많은 사람들은 십이지신이라는 상징조차 모른 채 지나갈 것이다. 그럼에도 이 같은 시도는 신도시의 공간적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나름대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판교신도시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조성된 도시다. 오래된 골목이나 세대를 넘어 축적된 기억보다는, 도시계획과 설계가 그를 대체해 자리 잡은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경관에는 새로운 도시 공간에 이야기를 덧붙이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십이지신 테마의 다리 역시 그런 맥락에서 등장했다. 신도시라는 새로운 무대 위에 전통의 이미지를 배치함으로써 도시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만들어내려는 시도인 셈이다.

 

한국토지공사가 다리에 주목한 이유는 판교라는 지명이 다리로부터 유래했다는 기록 때문이다. 이를테면 디지털성남문화대전은 판교(板橋)라는 이름은 널다리의 한자 표기이고, 널다리는 옛날 운중천의 하천 위에 널(판자)로 만든 다리를 놓고 건너다닌 데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이렇게 판교라는 지명의 기원과 다리를 연결하는 설명이 실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기록은 판교의 옛 이름인 너더리가 실은 넓은 들이 변한 말일 수도 있다는 해석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판교의 지명 유래를 다리에서 찾는 건 틀린 해석이 된다.

 

판교의 지명을 둘러싼 해석의 역사적 정확성 여부와는 별개로, 신도시 계획 과정에서 다리라는 이미지는 지역을 설명하는 중요한 소재로 활용됐다. 과거의 흔적이 상대적으로 적은 공간에서 다리는 새롭게 건설되는 도시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상징적 장치로 작동했다.

 

그렇게 운중천을 따라 다수의 교량이 조성됐고, 그 가운데 일부가 십이지신이라는 친숙한 전통적 상징을 입게 됐다.


▲ 운중천을 따라 건설된 십이지신 테마의 다리들(필자 직접 촬영). 각각 ‘토끼卯’, ‘용辰’, ‘양未’, ‘닭酉’을 상징화한 모양이라는 안내가 붙어 있다.  © 비전성남

 

흥미로운 점은 이 전통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생활 속 관습이라기보다, 특정한 시점에 새롭게 구성된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전통은 오래된 시간의 잔존물이라기보다 현재의 필요에 따라 선택되고 재배치되기도 한다. 결국 운중천의 십이지신 테마 다리는 신도시 경관 속에 전통을 시각화해 배치하려는 시도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도시를 연구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 풍경을 다시 낯설게 바라보는 일에 가깝다. 평소에 그저 지나치는 다리 하나도 시선을 조금만 바꾸면 다른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왜 이런 형태일까, 왜 이런 상징일까, 그리고 왜 사람들은 그 의미에 크게 신경을 두지 않은 채 계속 사용하고 있을까. 도시 공간은 완성된 결과물이라기보다 다양한 의도와 사용 방식이 겹치며 계속 만들어지는 과정에 가깝다. 십이지신 다리 역시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때 비로소 흥미로운 장면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실제로 다리 위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일상은 도시계획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흐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다리가 어떤 띠를 상징하는지, 어떤 의미로 만들어졌는지 알지 못한 채 지나간다. 출퇴근길의 빠른 걸음, 반려견과 함께하는 산책, 반복되는 운동 동선 속에서 다리는 점점 특별한 상징이라기보다 익숙한 풍경의 일부가 된다.

 

이 지점에서 신도시 경관의 묘한 역설이 드러난다.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기획은 분명 존재하지만, 실제 의미는 사용되는 과정 속에서 다시 만들어진다. 상징은 점차 배경으로 물러나고, 대신 걷는 몸의 감각과 반복되는 경험이 공간을 채워간다. 도시의 장소성은 그렇게 천천히 형성된다.

 

운중천을 따라 걷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도시의 이야기는 언제 시작되는가. 설계도 위에서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그 위를 걷기 시작하는 순간일까. 아마도 그 사이 어딘가일 것이다. 십이지신 다리들은 그 질문을 조용히 남겨둔 채 오늘도 그 자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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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정헌목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화인류학 전공

 

한국학중앙연구원(https://www.aks.ac.kr)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