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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물결이 톡톡 튀는 젊음처럼”.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의 응시생 필적 확인 문구다. 대리 시험 등을 방지하기 위해 2006학년도 수능부터 도입된 필적 확인 문구는, 사후에 문제가 생겼을 때 본인 확인용으로 사용한다.
필적으로 누군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는 필적의 기능은 조선시대 문과 운영에서는 우려 사항이었다. 문과의 시험 방식은 대부분이 글짓기, 즉 제술이었기에 응시자의 필적이 답안지에 그대로 드러나는데, 필적이 드러난 답안지로 시험관이 채점하는 과정에서 특정 응시자에게 유불리가 작용하는 것을 염려한 것이다.
역서(易書)는, 필적에 의한 응시자 특정을 방지하기 위해, 문과의 제술 답안지를 다른 이로 하여금 옮겨 적게 하는 제도였다. 북송대(960-1127)에 시작된 역서는 한반도에서는 고려 말에 건의되어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조선시대 문과의 역서는 각 부서에서 차출된 서리들이 담당하였다. 시험장 내에 주변과 차단되어 세워진 임시건물 안에서 서리들은 응시자들이 검은 먹으로 작성한 답안지를 붉은 먹으로 옮겨 적었는데, 원래의 답안지를 본초(本草) 역서한 답안지를 주초(朱草)라고 했다.
역서를 마친 후에는 차출된 관원이 본초와 주초를 대조하였다. 본초 담당인 지동관(枝同官)과 주초 담당인 사동관(査同官)이 오류가 없음을 확인한 후 시험관에게 주초를 보냈다. 시험관은 주초만을 보고 채점하여 합격 답안을 결정하였고, 이후에 본초를 찾아 순위를 기재하였다.
역서를 모든 문과에 시행한 것은 아니었다. 국왕이 직접 과거 시험장에 나오는 알성시, 정시 등의 친림과(親臨科)는 당일에 급제자를 발표하는 것이 원칙이었기에 시간이 소요되는 역서를 시행하지 않았다. 생원‧진사시에도 역서를 시행하지 않았다. 생원시와 진사시의 시험 방식이 모두 제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과와 달리 역서를 시행하지 않은 것은 시험의 목적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문과가 관료를 선발하는 시험이라면, 생원‧진사시는 유일한 최상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 수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시험이었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학생들을 선발하는 시험이었기에, 생원‧진사시의 경우 필체를 익히게 한다는 교육적 의도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연소한 유생들로 하여금 필법(筆法), 즉 좋은 필체를 익히는 것을 권장하기 위해서 생원‧진사시에서는 역서를 시행하지 않았고, 중종대의 기록을 보면 실제 제일 잘 쓴 글씨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이도 있었다고 한다.
17세기 후반부터는, 과거 응시자가 늘어나고 과거 설행 횟수가 증가한 것 관련하여, 역서에 소요되는 비용과 시간이 문제시되기 시작한다. 역서 비용은 실제로 국가 운영에서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비용을 문제시하는 것은 역서가 무용하다는 생각의 방증일 수 있다.
응시자 증가 등으로 역서에 소요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 관련해서는 합격자 발표의 지연과 그로 인한 과거 부정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걱정이 잇따랐다. 이외 역서 작업에 차출되는 서리나 감독관 매수로 인한 부정의 경우도, 조선 전기에는 시험장 관리를 보다 철저히 하는 식의 제도 정비를 고민한 것과 달리, 18세기에는 역서 폐지의 논거로 언급되었다.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부정에 대한 처벌 강화, 서리 숫자의 증대 등 제도 정비를 지속하였지만, 역서는 일련의 논의를 거쳐 헌종1(1835)년에 폐지된다. 제도의 효용이 다했기 때문인지, 폐지 이후 역서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제도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시험에서의 부정 방지 제도도 마찬가지다. 시험 방식, 시험 과목, 응시자 등 조건이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정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수에게는 시험에서 휴대할 수 있는 물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전자기기나 샤프가 누군가에게는 시험의 빈틈, 자신의 욕심을 부정하게 채울 수 있는 수단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26년에도 시험 부정을 막기 위한 노력은 여전하고, 그 과정에서 필적은 다시금 중요해진다. 본인 확인의 도구로. 가려야 할 특징이 아니라.
특별기고 정지연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육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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