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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수첩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5/09/21 [15:09]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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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수첩
김옥임 분당구 정자동
 
한 동네에 살면서 길거리, 혹은 이른 아침 출근길 전철이나 버스정류장에서건 아는 얼굴을 자주 마주치는 경우가 있다. 매일 그 시간, 그 차량에 한결같이 똑같은 시간대에 몸을 싣다 보니 낯익은 얼굴들이 많다.
그런데 그중에 유독 눈에 띄는 노인분이 있다. 연세가 칠순쯤 돼 보이는 이 어르신은 예사 사람들과 약간 다르다.
가죽 손가방을 들고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신문을 보다가 자리에 앉으면 열심히 신문의 사설이나 어떤 기사를 조그만 수첩에 적기 때문이다. 빨간색 펜으로 신문의 기사에 ‘밑줄 쫙’까지 하며 돋보기 너머에 있는 활자의 세계에 푹 빠진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가죽가방 속 수첩은 지식의 창고 같다. 특이하고도 놀라운 것은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마음의 동요없이 한결같은 글쓰기를 한다는 점이다.
엊그제였다. 할아버지가 열심히 필사하는 신문의 내용이 어떤건지 궁금증이 발동해서 살짝 ‘컨닝’을 했다. 내용은 이번에 시리아 난민을 유럽 국가들이 조건없이 받는다는 기사였다.‘할아버지가 유럽쪽 분야에 관심이 많으신가?’
궁금증을 가진 찰나,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너무 멋쩍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목례를 하자 할아버지는 그저 빙그레 웃으셨다.
“손주 놈한테 좀 갈켜 줄라고, 애들이 너무 어두워.”
애들이 너무 어둡다는 말씀은 요즘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이나 할줄 알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너무 생각들이 없어서 걱정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물론 입시 준비 때문에 교과서에만 파묻혀 있는 것도 걱정스러움의 일부였을 것이다.
“손주들한테 상식을 가르쳐 주시나 봐요. 너무 좋으시네요”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그저 피식 웃으셨다.
그 손주들 정말 행복하겠다. 어른으로서, 인생의 대선배로서, 그리고 부모로서 그 연륜과 지식을 바탕으로 손주에게 친절히 알찬 공부도 시켜주는 학구파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수첩 속에는 행복이 알알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