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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를 기억하다] 가족이 말하는 항일독립애국지사 故 김재동 옹(건국훈장 애족장)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7/02/24 [09:31]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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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에는 휴식이 없다”  
전남 함평이 고향인 애국지사 김재동 옹은 1928년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었다.
민족차별에 항거하는 재학생들이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식민지교육에 대항했던 동맹휴학사건은 무기정학을 당하면서도 일제에 굴하지 않는 항일독립 의지와 민족정신을 드높인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김재동 옹은 1929년 광주고등보통학교독서회에 가입해 선두적인 역할을 했다. 9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소했으나 퇴학을 당했다. 1930년 비밀결사인 반제동맹 전남농민조합을 결성해 농민들의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계몽했다. 전남농민조합과 전남노농협의회를 통합시켜 항일운동을 하다가 1932년 동지 50여 명이 함께 일경에 체포돼 1934년 11월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2년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8년부터 1936년까지 독립을 위해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김재동 옹은 “독립운동에는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 휴식이 없다”는 이념 하에 민족항쟁의 선두 대열에 섰다. 악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았던 김재동 옹은 고문여독으로 1975년 돌아가시는 날까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김재동 옹은 부인 양귀임(98) 여사와의 사이에 4남2녀를뒀다. 장남 김승범(78·수내2동) 선생은 아버지를 온화하고 마음이 넓고 인자했다고 회상했다. 1983년, 현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아버지의 명예졸업장을 대신 받아왔다.늦은 감은 있지만 정부에서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아버지는 취업은 할 수도 없었고 친척 밭일을 맡아 농사일을 하셨다”는 김승범 씨는 생활고 때문에 사범학교를 택했다. 아버지는 “네가 공부를 더해야 하는데 미안하다,미안하다” 하시더니 야간학교를 권하셨다. 조선대 야간학부 경제학과를 저녁을 굶어가며 열심히 다녔다. 중등교사자격으로 문교부 전문직을 거쳐 논골 성남상원여중학교교장으로 오게 됐고 2004년 정자동, 2006년 수내2동 주민이 됐다.
김승범 선생은 양영공업고등학교(현재 양영디지털고) 교장, 매송중학교 교장으로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말라”시던 어머니는 지금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신다. 부인 이정강(76) 씨는 시어머니의 편안한 식사를 위한 요리사가 돼 남편을 돕고있다. 부부는 어머니가 보실 노래책을 만들어 함께 노래도 부른다.
“어머니, 감자입니다. 어머니, 이번엔 밥입니다. 어머니, 맛있는 밀감입니다. 이번엔 물입니다.” 한 가지씩 숟가락에 떠서 어머니께 드리며 안심하고 드실 수 있도록 음식 이름으로 대답 없는 대화를 한다. 김승범 선생의 어머니 사랑은 못다한 아버지에 대한 사랑까지 더해서 온 정성을 쏟는다.

이화연 기자 maekr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