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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주소 체계의 역사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8/02/22 [16:59]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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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명주소가 도입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정부는 새 주소체계의 도입과 홍보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오래 써 오던 주소를 바꾸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개항기에도 그랬다. 조선시대에는 따로 주소라는 것이 없었다. 우리가 아는 오가작통(五家作統)은 호적 장부상에만 존재해서, 이사도 가지 않은 집이 3년 전에는 1통 2호였다가 어느 날은 2통 3호가 되는 일이 허다했다.
 
1896년부터 정부는 표로 된 신식호적을 1년마다 편성하게 하면서, 집집마다 고정된 통·호 번호를 매겼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집을 통·호로 부르지 않았다.

신식 호적 제도는 우편제도 도입과도 이어져 있었다. 조선시대까지는 각자 종(노비)이나 지나가는 길손에게 편지와 물건을 들려 보내는 사적 통신망밖에 없었다.
 
국가가 운영하는 근대적 우편제도란 훨씬 저렴하고 빠른 전국 배달 서비스였다. 하지만 우편제도가 작동하려면 전국적 교통·통신망은 물론 집집의 주소가 완비돼 있어야 했다.
 
1896년 시행된 신식 호적 제도에는 집집마다 대문에 통·호와 호주의 직업, 성명을 쓴 나무 문패를 내걸라는 명령도 포함됐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히 해결되지 않았다.

『독립신문』을 통해 이 시기(1897)의 실상을 엿보면, 대개 편지를 받는 사람을 “건춘문 건너 임봉운의 집 최주사”라든가 “진골 쫄쫄우물로 들창 난 집 사는” 누구라고 썼다. 무슨 동 몇 통 몇 호라는 호적상의 주소는 보이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허다한 박주사 댁과 김생원 댁을 찾을 수 없어 체전부가 종일을 헛걸음”을 하고, 결국 배달도 반송도 못한 편지가 우체사에 적성권축(積成卷軸)했다.

사실 편지 겉봉에 이름을 제대로 쓰지 않는 것은 단순한 실수나 무지가 아니었다. 웃어른의 이름에 대한 유교적 관습과 관련된 현상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왕이나 조상의 이름 글자는 함부로 입에 담지 않았고, 심지어 양반들은 관문서에 제 이름 올리기를 꺼려 자기의 소유권을 증명해야 할 토지 문서에도 노비 이름을 기재하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들과 서먹했던 주소체계는 식민지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정착됐다.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면서 통·호로 된 주소가 지적도상의 지번 주소로 바뀌었다. 법률적 질서가 중요해지면서 이 주소는 이름과 함께 누군가를 민법상의 사람인 ‘자연인’으로 표시하는 기호가 됐다. 어린아이도 제 집 주소를 외워야 했다.

박태원의 단편 『채가』(1941)에는 유치원 입학을 앞 둔 딸애가 집 주소를 외는 장면이 나온다. “너희 집이 어디지?”, “돈암정, 사백팔십칠번지의 이십이호예요.” 아이의 엄마는 어린 딸을 대견해하면서 행랑어멈은 들어온 지 8개월이 넘도록 번지를 외는 것은 엄두도 못 낸다고 한다.

주소를 익히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시기를 거치면서 우편은 삶의 기본적인 환경으로 변해갔다. 호적도 가족관계를 증명하는 필수적인 문서가 됐다. 입학과 취직에는 호적 등·초본이 필수적으로 요구됐고, 호적과 혼인 신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오늘날 지번이든 도로명이든 집집마다 틀림없이 주소가 매겨져 있고, 그것은 내 존재와 정체성을 입증하는 한 수단이 됐다. 그 주소로 배달되는 것이 정이 담긴 편지가 아니라 각종 고지서와 광고, 택배 상자뿐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