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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조선 국왕의 봄철 건강 나들이, 온행(溫幸)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8/03/22 [16:59]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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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본격적인 봄의 시작이지만 오락가락하는 꽃샘추위에 몸이 적응하지 못해 피곤함도 쉽게 몰려오는 시기다. 이맘때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온천욕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생각나는 휴식이다.

18년 백제 온조왕부터 712년 4월 통일신라 성덕왕이 온양에 다녀갔다는 기록이 보이며, 1082년 고려 문종이 남방 순행 길에 약 15일을 머물며 온천욕을 한 기록이 전한다. 조선시대에도 온천은 국왕의 질병 치료를 위해 애용되면서 국왕이 온천을 왕래하는 ‘온행(溫幸)’이 지속됐다. 태종까지는 황해도 평산 온천을 주로 이용했으나, 세종부터는 거리상의 이유로 충청도 온양의 온천이 선호됐다.

국왕이 머물었던 행궁인 ‘온궁(溫宮)’의 건립은 1432년 9월, 세종의 풍질 치료를 위한 온양 행차를 대비해 지역의 민폐를 줄이기 위해 만들었다. 온천은 25칸 규모로 정무 공간인 정청(政廳), 동서에 침전(寢殿) 2곳, 온천 목욕을 할 수 있는 탕실이 남북으로 2곳 있었다. 또한 세종은 행궁의 남북 공터에 새로 탕실과 건물을지어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왕실에서 온천을 이용하지 않을 때에는 왕실의 탕실 한 곳까지 개방해 민본정치와 여민동락을 실천했다.

1464년 세조가 온양의 행궁에서 머물 때, 뜰에 있던 오래된 우물에서 맑은 샘물이 솟는 것을 확인하고 ‘주필신정(駐蹕神井)’이란 이름을 내리면서 신정비(神井碑)를 새기도록 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인 자성대비가 온양 행궁을 다시 방문했다. 이때 자성대비는 신정비의 글자가 마모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비문을 다시 써서 새기게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온양팔경시가 전한다. 이숙함은 팔경시에서 “따뜻한 물, 신령한 진액이 사람의 질병을 쾌히 다스려, 해묵은 난치의 병이 저절로 없어진다네.”라고 해 온천의 효험을 찬양했다.

성종 이후 국왕의 온행이 축소되면서 온양 행궁은 점차 쇠락했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복건되지 못한 채 오랫동안 방치됐다. 이후 현종의 온양 행궁 행차가 결정되면서 행궁 터에 온궁이 100여 칸 규모로 복건됐다. 현종이 다른 국왕에 비해 온행의 횟수가 잦은 것은 안질과 피부병에 자주 시달렸기 때문이다. 온천욕에 효험을 본 현종은 이듬해 모친인 인선왕후를 모시고 다녀오기도 했다. 현종은 눈병으로 약 한 달 간 온궁에서 체류했다. 장헌세자(사도세자)는 피부 습창이 심해 내의원의 건의에 따라 온천을 찾았다. 왕의 온천욕은 탕에 들어가 몸을 담그거나 온천수를 머리부터 몸에 1천~2천회 끼얹는 방식이었다.

정조연간 이후에는 왕실의 온행이 중단되면서 일반 백성들에게 왕실이 사용하던 탕실까지 개방했고, 외정전은 19세기 후반 퇴락해 없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온궁 건축을 일본식 여관인 ‘온양관’으로 개조했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경남철도주식회사에서 온천장의 경영권을 사들여 ‘신정관’으로 운영했다. 이후 6.25를 거치면서 1956년 온궁 터에 조선철도호텔이 들어섰고, 결국 사유지가 돼 1967년 세워진 온양관광호텔 경내에는 영괴대와 신정비각만이 온양 행궁의 옛자취를 전한다.

이러한 이유로 온양 온천에 대한 우리의 인상이 일제강점기 이후 온양관이나 신정관같이 상업적 관광 온천 이미지로 고착돼 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행궁의 자취는 사라졌지만, 4월 봄꽃이 흐드러진 어느 날 온천을 찾는다면 영괴대와 신정비각과 마주하며 과거 왕실의 건강을 돌보고 백성들과 함께 동락하던 온천 행궁의 역사를 한 번쯤 되새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