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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영조의 장수비결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8/05/21 [15:11]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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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1대 왕 영조는 83세까지 장수했고 당쟁의 와중에서도 52년간 재위한 조선 최장수 왕이다. 그러나 영조는 본래 건강한 체질이 아니었다. 아버지 숙종도 건강 체질이 아니었다. 영조는 늘 숙종의 병간호를 7년간 했던 일을 내세우곤 했다. 형인 경종도 37세에 일찍 죽었으며, 생모인 숙빈 최씨도 49세에 병으로 작고했다. 영조는 유전적으로도 건강 체질이 아니었던 셈이다.

영조는 늘 건강을 걱정했다. 특히 추위에 약해서 인삼탕이 몸에 잘 받았다. 인삼을 주재료로 하는 이중탕(理中湯)으로 효험을 본 뒤 탕약의 이름을 ‘건공탕(建功湯 : 공을 세운 탕약)’이라 명명하고 내의원을 편작(扁鵲)이라 일컬었다. 편작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전국시대 명의다. 영조는 만년에 건공탕으로 연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수라보다 자주 건공탕을 먹어야하는 처지를 불평하곤 했다. 이미 질린 탕약을 하루 세 번 이상 먹어야 하냐고 따지기도 했다.

영조는 화타와 편작 등 중국의 명의와 중국의 의학서에 많은 관심을 보였을 뿐 아니라 허준과 『동의보감』에 대해서도 높은 평가를 했다. 『동의보감』을 의학서의 여러 가지 장점을 모은 ‘최고의 책’이라고 했으며, 허준의 자손을 서용해 그 공로가 직접적으로 후손에 미칠 수 있게 했다. 내의원에 대해 단순히 칭호만 높인 게 아니라 대우도 확실하게 했음을 보여 준다.

영조에게 닥친 시련은 노년이었다. 만년의 영조는 젊었을 때 자신과 국정을 의논했던 신하의 손자와 함께 국정을 운영해야 했고, 식욕도 성욕도 없고 게다가 잠도 오지 않는 지루한 나날을 견뎌야 했다. 자신보다 국정역량이 짧은 어린 신하들이 젊은 패기를 보이기보다는 시세에 따르고 고루한 데 빠져있는 행태를 바로 잡아야 했고 고질화된 당파싸움을 막을 수 있는 탕평정책을 펼쳐야 했다.

몸은 쇠약하고 정치는 답답하기만한 상황에서 영조가 선택한 해결방법의 하나는 글짓기였다. 정말 미친 듯이 글을 지었다. 어떤 해에는 천여 편이 넘는 글을 짓기도 했다. 하루에 몇 편씩 지은 셈이다.

『소학』과 『심경』 등을 나열하기도 하고, 어떤 책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기록하기도 했다. 창의궁 잠저를 찾아갔을 때 효장세자와 의소세손 등 먼저 간 가족들을 추모하는 심정을 몇 번이나 읊기도 했다. 영조가 지은 다수의 글은 같은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하면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내용으로 돼 있어 글을 짓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냐는 생각을 하게 한다.

영조는 66세에 장가를 들었고, 69세에 아들을 죽게 했다. 이런 결단은 건강을 자신하는 현대 노인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혼례가 복잡한 절차와 의례로 사람을 지치게 한다면 아들을 죽이는 일은 정신적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히게 한 뒤 영조는 차마 자신의 침실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의소세손이 공부하던 강학청에 머물면서 애통의 마음을 달래야 했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문건을 없애고 또 이와 관련된 어떤 언급도 하지 못하게 한 영조의 처분에서 결코 아물 수 없는 영조의 깊은 상처를 그려볼 수 있다.

영조가 현대의 우리도 감탄할 만큼 오래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본래부터 건강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내의원에 대한 남다른 대우, 자신이 살았던 생애에 대한 회고와 의미 부여, 그리고 무엇보다 늙은 나이에도 노인이라는 한계를 생각지 않고 결단하고 실천하던 태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