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복정동 기와말에서 시작한 성남누비길 종주가 어느새 중반을 넘어 다섯 번째 구간인 태봉산길에 닿는다. 태봉산길은 동원동 부수골 등산로 입구에서 운재산, 안산, 태봉산, 응달산을 지나 하오고개에서 내려온다. 임금의 태가 묻혔던 곳이라는 이야기 때문인지, 누비길 일곱 구간 중 가장 길어서인지 찾아오는 이가 적다. 동원동 머내마을 동원(東遠)동 머내마을 버스정류장에서 태봉산길을 시작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시 동막(東幕)동과 원천(遠川)동을 합해 동원리라고 했다. 머내는 원천동이 광주군 소속일 때 광주읍에서 가장 멀리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원동은 판교와 용인을 잇는 길목이다. 현재는 사회기반시설이 부족하지만 옛날에는 대장간과 시장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주로 대장간 주변 성황당에 모시는 소형 철마가 판교에서 여럿 출토됐다. 운재산 → 안산 → 태봉산 이정표를 따라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자 검은 날벌레들이 달려든다. 가늘게 쭉쭉 뻗은 나무들이 하늘부터 사방을 가린다. 층층이 드리우는 나뭇가지들 사이로 한 사람 지날 만한 산길이 놓여 있다. 시야가 막힌 산속을 길만 바라보며 걷는다. 긴장도 잠시, 몸과 마음이 적막에 잠긴다. 안골약수터를 지나자 껍질이 길게 벗겨진 굴참나무들이 보인다. 겉껍질과 속껍질 사이의 코르크를 채취하기 위해 칼집을 낸 흔적이다. 불법임산물 채취로 단속대상이다. “태봉산 2.8㎞”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길은 운재산 → 헤리티지삼거리 → 안산 → 대지산 → 고기삼거리 → 대장삼거리 → 쇳골삼거리(둔지봉)로 이어져 정상에 다다른다. 봉우리 없이 이어지는 길이 밋밋해서 재미는 덜하지만 나뭇잎들 사이로 비치는 햇빛과 길에서 이리저리 나부끼는 그림자들에 마음이 달뜬다. 마음이 먼저 길을 밟는다. 쇳골은 금곡동에 있었던 자연마을로 쇠가 나오는 광산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광산을 개발하려 했으나 품질이 좋지 않아 중단했다는 설이 있다. 태봉산의 또 다른 봉우리 대장동 태봉(胎峯)은 마을 뒤로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반구형으로 풍수지리상 길지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조선 인조 임금의 태를 묻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인조는 임진왜란 중에 황해도 해주부 관사에서 태어났다. 1928년 11월 22일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황해도 내의 태항아리들을 서삼릉으로 옮겼으나 현재 서삼릉에는 인조의 태항아리가 없다. 옮기는 과정에서 유실된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시대 왕실의 태를 묻은 산봉우리를 태봉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전국에 그 지명이 남아 있다.
응달산 → 하오고개 태봉산 정상에서 응달산으로 간다. 짙은 그늘에 관목과 덤불들이 가파른 내리막을 덮는다.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 불안할 쯤 누비길 리본이 보인다. 태봉산길에서 가장 반가운 건 뜨문뜨문 나타나는 표지목과 이정표, 등산리본이다. 두밀로에 도착, 남서울파크힐 진입로를 지나 응달산 들머리에 도착한다. 여러 개 송전탑 밑을 지나면 정상이다. 주인인 양 하늘로 치솟은 송전탑과 그 위세를 꺾으려는 듯 내리쬐는 햇빛,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이마에서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이 싫지 않다. 성남전력지사가 보이는 갈림길에서 등산리본을 따라 긴 그늘을 내려오니 석운로다. 도로를 올라가다 갈림길에서 이정표를 따라가면 출입금지구역이다. 바리게이트 옆에서 태봉산길 마지막 오르막을 오른다. 많이 가파르다. 다리는 여러 번 쉬지만 마음은 급하다. 하오고개는 운중동에서 의왕시 청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고개 정상에서 방송송신탑을 지나 밧줄을 잡고 내려온다. 태봉산길 완주다.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과 뿌듯함이 차오른다. 등산육교를 건너면 누비길 6구간인 청계산길 시작이다. 성남에서는 시비가 붙은 두 사람이 원님을 찾아가다 이곳에서 화해했다고 해서 하오고개로, 의왕에서는 청계동에 있던 어느 한 종산(宗山)이 학이 거동하는 형세를 닮았다고 해서 학고개, 학현(鶴峴)으로 부른다고 한다. 모두 구전으로 명확한 내력은 없다. 누비길 문의 : 성남시 녹지과 031-729-4302 전우선 기자 folo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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