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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역사 속 위인들의 재미있는 독서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8/08/22 [15:45]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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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득신이 만년에 세운 독서재 ‘취묵당’(충북 괴산군 소재)    © 비전성남
 
▲김득신의 독서기록 ‘독수기’     © 비전성남
 
개권유익(開券侑益)은 ‘책을 펼치면 얻는 것이 있다’는 뜻으로 책읽기를 좋아한 중국 송나라 태종 조광의가 남긴 말이다. 지식과 감동과 재미를 선사하는 독서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 중국에서는 죽간으로 책을 만들었다. 죽간이란 대나무를 불에 쬐어 푸른빛을 없애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 놓은 것으로 여기에 글자를 적은 다음 끈으로 이어 묶어 책을 만든 것이다.

공자는 책을 어찌나 열심히 읽었던지 죽간을 묶은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도 공자나 조광의 못지않은 독서광이 많다.
 
세종은 좋은 책을 100번 읽고 100번 생각하는 독서를 실천했다. 정독을 실천한 세종의 독서는 깊은 밤까지 이어지곤 했다. 옻나무 열매로 짠 기름으로 등불을 밝히면 그을음도 없고 환하기까지 해서 세종은 온 나라의 감사들에게 옻나무 열매를 올리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또한 세종은 독서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집현전 학자들에게 ‘사가독서’라는 책 읽는 휴가를 주기도 했다. 먹고 사는 걱정 없이 책만 읽으라는 의미로 월급이 지급됐다. 독서와 사색을 강조한 세종을 잘 알게 해 주는 독서휴가다.

조선 정조시대 스스로를 ‘간서치(책만 읽는 바보)’라 부른 이덕무도 대단한 독서가였다. 이덕무는 서자로 실력은 뛰어났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글을 배운 후 오직 책 읽는 것을 하늘의 뜻으로 여겼다.
 
집안이 가난해 종종 굶주렸으나 2만여권의 책을 읽고 빌려본 수백 권의 책을 한 자 한 자 직접 베껴 썼다. 나중에 그걸 들고 다니면서 다시 읽었다. 그는 입으로 소리 내 반복해서 읽고, 글의 뜻을 되새기며 천천히 읽을 것을 강조했다. 또한 글을 읽을 때는 시간을 정해놓고 매일 읽으라고 했다.

책을 좋아했던 정조가 1779년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해 서자 출신의 우수한 학자들을 검서관으로 등용했을 때 이덕무는 박제가, 유득공 등과 함께 검서관으로 뽑혀 능력을 발휘했다. 이덕무는 1793년 1월 25일 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정조는 그의 지식과 재주를 애석하게 여겨 내탕전이라는 임금의 개인재산 500냥을 내려 8책 4권의 《아정유고》라는 문집을 만들어 줬다. 아정은 ‘우아한 정자’라는 뜻의 이덕무 호였다. 정조가 이덕무를 얼마나 아꼈는지 잘 알 수 있다.

자신이 사는 집 이름을, 책을 억만 번 읽은 집이라는 뜻으로 ‘억만재’라 지은 조선후기 시인 김득신도 대단한 독서광이었다. 선조 때 태어난 백곡(柏谷) 김득신은 머리가 나쁘고 재주가 모자란 사람이었고 열살에야 겨우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들보다 수십 배, 수백 배 피나는 노력으로 뛰어난 시인이 됐고 환갑이 다 된 나이에 과거시험에 급제했다. 그는 한 권의 책을 읽고 또 읽었는데 《사기》 ‘백이전’은 무려 1억1만3천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김득신은 자신이 책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독수기’에 일일이 기록해 놓았는데 1만 번 이상 읽지 않은 책은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많은 책을 반복해 읽고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했는지 알 수 있다.

책을 사람처럼 공경한 걸로 유명한 조선의 문학가 박지원은 책 앞에서는 하품하거나 기지개를 켜지말고 졸지도 말며 기침이 나올 것 같으면 고개를 돌려 책을 피하라고 했다.
 
2018년은 책의 해다. 책을 소중하게 여기고 깊이 있는 정독을 실천한 조상들의 독서법을 새겨둘 만하다. 바쁜 일상으로 책을 가까이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매일 일정한 시간을 독서하라’는 이덕무의 가르침을 독서의 계절, 이 가을에 실천해 보길 바란다.
 
김기숙 기자  tokiwif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