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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소혜왕후, 현실에서 못 이룬 꿈 『내훈』에 담다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9/01/23 [14:46]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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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훈』,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비전성남
 
조선왕조 전체를 통틀어 가장 특별한 왕비를 꼽으라면 인수대비로 널리 알려진 소혜왕후를 꼽을 수 있다. 보통 왕이 책봉되면 그의 배우자는 왕비가 된다. 그런데 소혜왕후는 그렇지 못했다. 자신의 아들이 왕(성종)이 되면서 죽은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대왕으로 추존됐다. 따라서 소혜왕후는 덕종대왕비인 인수왕비가 됐다.

‘소혜왕후’라는 칭호는 묘호(廟號)다. 정작 그녀는 ‘왕후’라는 호칭처럼 살아생전 왕비의 지위를 누려본 적도 없다. 남편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에 왕의 며느리, 어머니, 할머니였을 뿐이다.

그러나 소혜왕후는 조선왕조의 다른 어떤 왕후보다도 완벽하게 준비된 왕후였다. 시아버지인 세조가 왕위를 찬탈해 왕이 되고 자신의 남편이 세자가 되면서 소혜왕후는 가까운 미래에 왕비의 자리에 오를 것을 약속받았다. 전통시대에 남편의 그늘에 가려진 대부분의 여성들과 달리, 조선시대의 왕후는 절대 권력의 중심부에서 왕실문화의 중심축 역할을 했다. 왕과 왕비는 최고의 권력을 소유한 인물이었고 사회적으로도 가장 이상적인 요건을 겸비한 최고의 리더이기를 요청받았다. 소혜왕후는 이런 요건을 겸비한 왕후가 되기를 꿈꿨다.

남편 의경세자가 왕이 되기 전에 죽으면서 그녀의 꿈은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이 돼버렸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어린 아들이 왕이 되면서 수렴청정을 통해 다시 한 번 그녀의 꿈을 펼칠 기회를 만났지만, 원상들의 반대로 그 꿈마저 좌절됐다.

소혜왕후는 어린 성종이 성장해 수렴청정을 끝내고 친정을 실시하기 1년 전 부녀자를 가르치기 위한 교훈서 『내훈(內訓)』을 한글로 편찬했다. 그 당시 15세기 조선의 여성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지성을 지녔던 그녀가 적극적인 글 읽기를 통해 준비한 완벽한 왕후의 삶을 『내훈』에 녹여냈다.

『내훈』을 편찬한 1475년은 훈민정음을 창제(1443)하고 30여 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훈민정음을 배운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소혜왕후가 『내훈』을 편찬한 것은 그동안 한자로 기술돼서 중국고전에 소외돼 있던 여성들이 중국 고전을 맛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 획기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내훈』의 편찬은 단순히 부녀자들의 교육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내훈』을 저술할 당시 왕실은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어서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마음속에는 큰 걱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성종의 첫 번째 비인 공혜왕후가 죽어 중전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다. 새로운 중전을 맞아야 했는데, 그 후보가 될 수 있는 성종의 후궁이 여러 명 있었다.

소혜왕후가 『내훈』의 서문에서 “옥 같은 며느리를 얻고 싶다”고 밝힌 것은 이러한 왕실이 처한 상황에서 비롯된 현실적이고 간절한 바람이었다.

소혜왕후는 『내훈』의 「부부장」에서 중국 역대 왕후의 사례를 통해 그녀가 꿈꿨던 완벽한 왕후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줬다. 서문에서 “성인의 가르침을 보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귀하게 되면 원숭이에게 관을 씌운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은 중전 후보들에게 소혜왕후가 던지는 강력하고 엄중한 메시지인 셈이다.

『내훈』의 편찬이라는 시어머니의 간절한 기대 속에서 탄생한 새로운 중전은 누가 됐던 이 기대를 충족시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됐다. 새롭게 중전이 된 연산군의 생모윤씨는 1475년 8월 왕비에 책봉되지만 바로 다음해 폐위론이 나오고 1482년 끝내 사사됐다.
 
소혜왕후가 보기에 연산군의 생모 윤씨는 ‘관을 쓴 원숭이’에 불과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