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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조선시대의 위장전입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9/02/21 [16:23]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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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도 지방의 과거시험_국립중앙박물관     © 비전성남
 
장관 등 고위공직자들의 국회청문회를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제가 위장전입이다. 부동산투기를 위한 위장전입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자녀를 원하는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한 위장전입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위장전입은 조선 후기에도 문제가 됐다.1736년 4월, 영조는 전 해에 태어난 늦둥이왕자인 사도세자 이선을 세자로 책봉하고 이를 축하하는 특별 과거시험인 책례경과 정시(冊禮慶科庭試)를 열었다. 이때 후정시(後庭試)에서 1등과 2등으로 뽑힌 광주(廣州)의 홍계만과 개성의 김태검의 합격이 취소되는 일이 발생했다. 합격자를 대상으로 호적을 조사한 결과, 두 사람의 실 거주지가 ‘서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즉 홍계만과 김태검은 지방으로 위장전입해 과거에 응시, 합격했던 것이다.

조선은 3년에 한 번씩 전국적으로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이 ‘정기시’는 전국 응시자들이 각각 초장·중장·종장으로 나눠진 초시와 복시의 과정을 거쳐야합격에 나아갈 수 있었다. 반면 나라의경사 등의 이유로 치러지는 ‘별시’는 한 번의 시험으로 합격이 판가름 났고, 응시자격을 제한하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일단 응시하면 합격하기가 정기시에 비해 수월했다.

따라서 많은 과거 응시자들이 별시를 선호했고, 특정 지방으로의 위장전입은 별시를 통해 과거에 합격하고자 하는 욕망이 불법행위로 나타난 것이었다. 특히 평안도와 함경도, 강화와 제주 등 국방의 요충지에서 설행되는 별과는 더 심했다. 이 별과는 변방의 백성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실시했기에, 해당 지역의 유생으로 응시를 엄격히 제한했다. 따라서 응시자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 아니라, 변방의 특성상 교육과 학문적 성취도 높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경쟁이 심한 지역의 유생들이 불법을 감수하고라도 위장전입을 통해 과거합격을 도모했다.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 역시 무거운 세금과 부역을 피하기 위해 위장전입을 시도했다. 특히 이웃 한 고을임에도 세금과 부역의 차이가 많고 역의 고충이 심한 곳에서 주로 발생했다. 위장전입은 18세기동안 지속적으로 문제가 된다. 제주는 바다 방어의 요충지이자 조선의 목장이었고, 제주에서만 구할수 있는 특산물 등으로 인해 육지에 비해 매우 무거운 역들이 주민들에게 부과되고 있었다.
 
특히 제주목에 비해 작은 고을인 대정현과 정의현의 주민들은 무거운 역을 짊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제주목과의 접경지 주민들은 이를 피해 제주목에 위장전입을 도모하곤 했다. 이를 통해 제주목의 일반 군역을 수행하고, 실제 거주지에서 부과되는 목장의 일을 하는 목자나 봉수를 지키는 연군 등의 고역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같은 행위는 개별 행위였지만, 그것이 확대됨에 따라 제주목과 대정·정의현 간의부세 불균형은 더욱 심화됐고, 남아 있는 대정·정의 현 주민들의 부세 부담은 더욱 무거워져 제주도 전체의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조정에서도 수차례 논의했으나 제주의 수령들에게 올바른 통치를 당부할 뿐, 별다른 근본적인 방책을 내놓지는 못했다.
 
양반들의 위장전입이 과거급제라는 개인과 가문의 영달을 도모한 것이었다면, 백성들의 그것은 불균등한 부세제도 속에서 부과되는 가혹한 부담을 회피하기 위한 생계유지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원인이 어디에 있건, 위장전입이란 행위는 남의 권리와 이익을 가로채고, 공동체 전체의 부담과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해결은 양반 상류층에 대해서는 엄격한 법 집행을, 백성들에 대해서는 부세불균형 해소라는 근본적인 접근을 통해 이뤄져야 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19세기 민란의 시대와 함께 조선도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