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목) 오전 10시 성남시청 온누리실에서 ‘현대사 속의 성남’을 주제로, EBS <세계테마여행>의 역사여행가로 알려진 권기봉 작가의 성남행복아카데미 특강이 열렸다.
광주 대단지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우리 지역 성남은 한국전쟁을 겪은 후 그 상처를 치유해가는 격변의 시기 한국의 정치적·역사적 사건의 산물로 생겨난 도시다. 성남의 이야기는 한국전쟁의 상처와 서울의 현대사를 돌아보며 시작된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의 무장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한 ‘김신조 무장간첩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돼 미해군 83명중 1명 사망하고 13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또 같은 해 10월부터 12월 사이에는 ‘이승복 사건’으로 알려진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이 발생했다. 120명의 무장공비 중 113명은 사살되고 7명은 생포했지만 남한도 군경 38명, 민간인 23명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우리가 북측의 도발로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겪는 상황에서도 미국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심지어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된 상황에서도 미국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베트남전을 치르던 미국은 전쟁을 싫어하는 국민들 여론을 등에 없고 베트남전 조기종식을 공약한 닉슨이 당선된 시기였기 때문에 남북 간의 이런 문제를 크게 이슈화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계기로 남한은 안보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영화 <실미도>로 잘 알려진 ‘684부대’. 이른바 ‘북파공작원’부대를 창설한다. 북한에 침투해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인민군식 실전 훈련을 받고 인간병기로 만들어졌지만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등으로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유명무실해진다.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의 전투 훈련을 위해 예비군제도를 강화하고 육군장교 양성기관으로 일명 ‘충성대’로 알려진 육군3사관학교를 창설한다. 안보 인식과 전시상황에서 대처능력을 높인다는 명분 아래 1969년에는 교육훈련, 즉 교련(敎鍊)을 고등학교 필수과목으로 지정해 학생들도 훈련을 받게 했다. 전쟁을 대비해 서울을 요새화하는 계획을 세운다. 남산 1·2호 터널은 각 15만 명씩 수용가능하고 자체 발전 설비를 갖춰 건설했다. 유사 시 서울시청을 지하로 옮겨와 버틸 목적으로 시청역에서 을지로 6가까지 지하상가를 건설한다. 유사 시 북한군에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최대한 한강 수면에 가깝게 잠수교를 설치했다. 경기 북부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상에 폭약을 넣어 터뜨리면 도로를 막을 수 있는 대전차 장애물을 만들었다. 대형건물을 설계할 때 유사시를 대비하도록 했다. 그 대표적인 건물이 서대문에 위치한 유진상가다. 건축면적이 9,667.57㎡, 길이 220m, 폭 44m에 달하는 5층 규모의 주상복합 형태의 대형건축물이다. 건물이 너무 넓으니 주거가 들어가는 상부를 길게 둘로 나누고 그 사이에 중점을 두었는데 단일 건물로 이보다 더 큰 경우는 손으로 꼽을 정도라고 한다.
북한군이 구파발을 뚫고 남하할 경우 이를 저지해야 하는 수도권 방어선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곳이었으니 유사시 1층 북쪽 필로티(기둥) 구멍에 폭약을 넣고 터뜨림으로써 통일로를 이용한 북한의 남침 속도를 저하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은 낡고 흉물스런 모습으로 남아있지만 남북대결의 아픈 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50년 6·25전쟁 당시 150만이던 서울 인구가 1960년대 중반 380만 명을 넘어섰다. 도심은 사람들로 미어터졌고 야산과 천변 각종 움막에 판자집으로 가득했다. 남북 간 크고 작은 교전이 끊이지 않고 전쟁의 불안함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피난하기 용이하고,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 서울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 한강 이남(강남)을 개발하게 된다.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를 건설하고, ‘말죽거리’로 더 친숙했던 양재동에 경부고속도로가 뚫리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던 가난했던 농촌 강남에 상전벽해의 순간이 도래하게 된다.
서울 용산, 영등포, 청계천 일대의 빈민가 정비 및 철거민 이주 사업의 일환으로 1968년부터 만든 35만 평 규모의 위성도시, 지금의 성남시 중원구·수정구 일대에 광주 대단지를 만든다. 1969년부터 대다수가 청계천, 영등포와 용산 등지의 무허가 판자촌에서 강제 철거된 주민이었던 2만1,372가구 10만1,325명을 이주시켰고 1971년 8월까지 토지분양과 일터를 약속하고 이주시킨다. 그러나 당시 이주민 대다수는 건설 일용직, 비정규직, 하층 판매직이나 단순 임시노동자들이었고 광주 대단지 일대는 그들의 일자리 등 생계수단이 없었다. 그리고 철거민 주거지 조성 과정에서 땅 투기, 분양권 분배과정에서 문제 발생, 상수도·화장실·교통수단 미비 등의 많은 문제가 속출한다. 특히 이주민들에게 평당 2천 원으로 불하기기로 했던 땅값을 평당 8천~1만6천 원으로 대폭 올린 뒤, 일시불로 납입하라고 통지하면서 입주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설상가상으로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선에서 박정희의 승리로 끝나자 이들의 요구를 신경 쓰지 않았고 결국 수만 명의 주민이 정부와 서울시의 일방적 행정에 항거해 1971년 8월 10~12일 도시를 점거하고 공권력 해체를 요구하는 광주 대단지 사건이 일어난다.
시위대 진압에 실패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내무부 장관, 양택식 서울특별시장과 경기도지사를 파견해 주민들에게 사과하고 요구 조건을 수용하면서 3일 만에 진정된다. 광주 대단지는 슬프게도 버려진 도시인 듯했지만 자생력 있는 시민들의 힘으로 발전해왔다. 한국전쟁과 분단의 첨예한 대치상황이 낳은 산물이지만 한국 현대사 거의 최초 대단지 계획도시를 만든 중요한 사건이었다. 역사는 발전해 간다. 다만 직선형이 아닌 나사의 나선형처럼, 인권이 신장하고 자유가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보와 퇴보, 반동을 겪으면서 발전해 간다. 우리의 삶은 역사 그 자체인 것이다. 우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직시하고, 어제보다 나은 선택을 하면서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성남행복아카데미 다음 일정은 3월 21일(목) 오전 10시 성남시청 1층 온누리실에서 ‘트렌드 코리아’를 주제로 열린다. 성남시민 누구나 무료입장해 자유롭게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취재 나안근 기자 95nak@hanmail.net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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