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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와 강빈 이야기

성남의 역사이야기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5/03/23 [15:18]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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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12월 병자호란 당시 거친 숨을 내쉬며 가파른 남한산성을 다급하게 오른 사람으로 인조가 떠오르겠지만 그를 따르는 무리 속엔 소현세자가 있었다.

청의 10만 대군의 공격으로 6일 만에 수도 한양이 적군의 손에 들어가고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는 시도가 좌절되면서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결국 조선은 강화를 청했고 삼전나루에 나가 삼배구고두의 예를 갖춘 다음 항복의 조건으로 소현세자 부부는 청에서의 인질생활을 보내게 된다.

옛 고사성어에는 재앙이 바뀌어 복이 된다는 뜻의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있다. 전쟁에 패해 적국의 인질로 끌려간 것은 분명 화였지만, 그 때문에 소현세자는 새로운 세상에서 다양한 경험을 가지며 당시의 조선의 실정을 보다 폭넓은시각에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소현세자 일행이 청국에서 기본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자금이 필요했는데 이런 문제점을 해결해준 것이 바로 강빈(姜嬪, ~인조 24년)이었다.
 
강빈은 사무역을 통해 조선의 종이라던가 표범가죽 등을 거래해 상당한 재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인질생활 5년째, 청나라는 소현세자 일행에게 식량을 자급자족하라며, 생각지못한 제안을 한다.

따라서 강빈은 유랑민으로 전락했던 한족과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대거 고용하고 우마차 등을 사들여 대규모 농장을개척했고, 여기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게됐다. 식량난을 겪고 있던 청국으로서도 상당한 도움을 받게 돼, 소현세자 내외에게 더욱 우호적이었다.

청나라에서 많은 서양문물을 접한 소현세자는 이 놀라운 문명의 기기를 하루라도 빨리 조선으로 가져가서, 조선을 청국 못지않은 근대 국가로 발전시킬 생각뿐이었다. 또한 그는 이러한 기기들을 직접 보된다면, 그의 아버지인 인조조차도 분명 크게 놀라워하며 기뻐하리라는 확신이있었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행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인조는 볼모로 잡힌 지 8년 만에 억류생활에서 풀려나 다음해인 1645년 2월 조선에 입국한 소현세자를 냉대했다. 인조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가장 큰 명분이 북방야만족과 야합했다는 것인데, 소현세자는 그 명분을 정면으로 위배한 셈이었다.

소현세자에 대한 분위기가 극단적으로 바뀌자, 여성도 충분히 사회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강빈의 처지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상 왕위계승은 봉림대군 쪽으로 기울어졌고, 당시 아픈 소현세자에게 어의는 학질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인조의 주치의인 이형익은 소현세자의 열을 내리기 위해 세 차례 시침을 행하
였다. 그런데 3일 후 소현세자는 사망하고 말았다. 과연 소현세자는 이형익의 시침 실수에 의해 3일 만에 사망하였을까?
 
보통 종친이 사망해도 시술을 잘못한 의원이 징계를 받는 것은 당연하였지만, 왕위 계승권자인 소현세자의 시술을 잘못했다는 이형익은 전혀 징계받지 않았다.

소현세자의 장례절차는 당연히 세자의 예를 갖춰야 했지만, 일반 사대부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절차만을 행했으며 그나마도기일을 대폭 단축했다.

강빈 역시 1646년 3월 소현세자가 사망한 지 1년 만에 사사(賜死)되는데 그녀의죄목은 왕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역사가들은 아마 소현세자가 살아있었다면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이백 년은 더 앞당길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조심스런 상상을 해본다.

새해가 어느덧 한 분기가 지났다.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지난 과거에 연연해 놓치고 있는 것이 없는지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역사이야기다.

 
                                                                                          김기숙 기자 tokiwif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