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2년 남한산성 수어사 정홍순에게 내린 유서 © 비전성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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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왕이 성남 지역에 주둔하는 남한산성의 군대를 동원할 때 어떻게 했을까? 답은 유서(諭書)와 밀부(密符)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법전에는 병력을 동원해 반란의 기미에 대응하는 일이 있으면 밀부를 합쳐서 간사한 일을 막으며 이전에 받은 유서에 따라 거행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유서는 국왕이 새로 임명된 관찰사·유수·통제사·통어사·절도사·방어사·수어사 등에게 밀부의 우측과 함께 내리는 밀부유서(密符諭書)이며, 비상시 병력의 동원 내용을 담고 있다. 1772년(영조 48) 남한산성 수어사 정홍순(鄭弘淳)에게 내린 유서를 살펴보자.
《경은 한 지방을 위임받았으니 맡은 임무가 가볍지 않다. 무릇 군사를 일으켜 기미(機微)에 대응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며 적을 제압하는 것은 한결같이 응당 평상시의 일이며, 본래 옛날 법도에 있다. 생각건대 혹시 내가 경과 독단으로 처리할 일이 있으면, 밀부(密符)가 아니면 시행하지말라. 또 뜻밖의 간사한 모반을 미리 방지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만일 특별한 명이 있으면 밀부를 합쳐서 의심이 없는 후에 명에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압(押)한 제41부를 내려주니 경은 이를 받으라. 그러므로 유시한다.》
- 건륭 37년 8월 초6일
유서는 전반부에 남한산성 수어사로서 담당해야 하는 임무에 관한 내용을, 후반부에는 병력을 동원할 경우 밀부를 확인한 후 시행할 것과 제41부의 밀부를 내려 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밀부는 국왕이 지방의 군대를 동원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 사용하는 부신(符信)으로 양쪽으로 나누어진 좌측면과 우측면을 서로 맞춰 이상이 없을 경우에 병력을 동원했다. 산유자(山柚子) 나무로 만든 밀부는 둥근 모양으로 지름은 3촌 3푼이고 두께는 3푼 5리이며, 45부를 제작해 가운데를 나눠 사용했다. 앞면과 뒷면은 모두 붉은 색으로 글씨를 썼는데, 앞면의 가운데에 제1부에서 제45부까지 차례로 새겼으며, 좌측에는 ‘좌(左)’를, 우측에는 ‘우(右)’를 새겼다.
뒷면에는 국왕의 어압(御押)을 새겼는데, 이 때문에 새로운 국왕이 즉위하면 기존의 밀부를 모두 거둬들인 후 밀부를 새롭게 제작해 전달했다. 이것은 왕권의 변화에 따라 지방의 군사권도 옮겨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추후에 제46부에서 제54부까지 9개를 만들어 총 54개 밀부가 있었는데, 추가로 만든 9개 밀부는 별도로 보관해 기존에 만든 밀부가 부족할 때 사용했다.
밀부는 모두 좌측이 2개이고 우측이 1개인데, 밀부를 받는 관원이 새롭게 임명되면 밀부의 우측 1개를 내려 줬고, 좌측 2개는 밀갑(密匣)에 넣어 대전에서 보관했다. 밀부를 받은 관원이 체직(遞職 : 직책이 바뀜)이 되면 해당 관원은 반드시 밀부를 승정원에 직접 납부했고, 무직이거나 사고가 있는 자는 궐 밖에서 직접 납부했다. 이러한 명을 따르지 않은 자는 처벌할 정도로 밀부의 관리는 엄격했다.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명소호부밀부책(命召虎符密符冊)』은 밀부의 반입과 반출을 기록한 장부다. 여기에 밀부 번호, 해당 밀부를 수취하는 관직·성명·착명(着名), 반출과 반입을 담당한 승지의 성명과 착명을 수록해 밀부를 철저하게 관리했다.
유서와 밀부는 국왕이 지방의 군사권을 통솔하는데 사용됐다. 국가의 변란이 일어나서 지방의 병력을 동원해 제압해야 할 경우에 국왕은 밀부의 좌측을 내려보냈고, 해당 관원은 자신이 갖고 있는 우측과 맞춰 확인한 후 병력을 동원해 변란을 제압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국왕은 해당 관원이 임명될 때 유서와 밀부의 우측을 내려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