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_여름방학 가볼 만한 전시·체험] “태평한 그날이 오면 돌아와 머물리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19 기획전시 <임청각, 그리고 석주 이상룡>
▲ 안동 소재 임청각 전경. 사진_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 비전성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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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19 기획전시 <임청각, 그리고 석주 이상룡>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藏書閣)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청각(臨淸閣)의 정신과 역사를 되짚어보는 전시 <임청각, 그리고 석주 이상룡>을 8월 17일까지 연다.
경북 안동 임청각은 2017년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전 가산을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로, 무려 아홉 분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고 대한민국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언급되면서 알려진다.
▲ 석주 이상룡 선생과 손부 허은 여사(사진_한국학중앙 연구원 제공) © 비전성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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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이씨 가문의 종손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은 국운이 기울자 의병운도을 지원하고 근대식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등 애국계몽 운동을 펼치고 안동 유가(儒家)로서는 처음으로 노비문서를 불태운다.
석주 선생은 한일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 1월 가산을 처분하고 솔하의 50여 가구를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한다. 가산을 처분해 마련한 독립운동자금이 바닥을 드러내자 석주 선생은 400년 종가 임청각을 매각한다.
석주 선생이 모든 것을 털어 지킨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 총 3,500여 명을 배출하고 의열단과 광복군 등 무장독립운동의 주축이 된다. 석주 선생은 1925년 68세에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추대되지만 몇 달 후 사임하고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과 항일독립운동에 매진한다.
석주 선생은 1932년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유골을 조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거한다. 석주 선생의 유해는 1990년에야 돌아왔고 1996년 국립현충원에 안장된다. 국적은 2009년이 돼서야 회복된다.
1942년 일제는 임청각 마당을 가로지르며 중앙선 철로를 놓는다. 99칸 임청각은 행랑채와 부속건물이 헐린 채 70여 년이 지난 최근 철로 철거와 복원이 결정됐다. 석주 선생의 현손 이창수 씨는 방송에서 “임청각은 중앙선 철로를 철거해야 비로소 독립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석주 선생 서거 후 조국으로 돌아온 아들 이준형 선생은 일제의 압박과 회유를 견디다 못해 1942년 생일에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 손자는 동족상잔의 피난길에서 사망한다.
부인부터 손부까지 석주 선생 일가의 부인들은 서간도 척박한 땅을 일궈 가족들과 독립군을 뒷바라지하고 안위에 노심초사했다. 일제경찰의 감시를 피해야 하는 귀국길은 망명길보다 더 힘들었고 해방된 조국에서는 가난에 시달리며 가족의 생계를 도맡아야 했다. 석주 선생의 증손들은 고아원에서 자라기도 했고 정규교육도 어려웠다.
독립운동가 가문인 의병장 왕산 허위 집안에서 시집와 남편까지 3대의 항일투쟁을 뒷바라지한 석주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1907~1997)에게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이로써 임청각은 독립운동 유공자만 모두 10명이다. 허은 여사는 회고록『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남겼으며, 성남시의 독립운동가 웹툰 프로젝트 33인 중의 한 분이다.
장서각의 이번 전시에서는 서간도에 독립운동기지인 경학사를 세우면서 지은 <경학사취지서>를 비롯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임청각과 선산을 매매한 <임청각매매문서>, 김규식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으로부터 받은 용장(龍杖), 이준형 선생의 유서 등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
‘태평한 그날이 오면 돌아와 머물리라’는 석주 선생이 서간도로 망명하며 쓴 거국음(去國吟)의 마지막 구절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031-730-8820,
분당구 하오개로 323(운중동)
취재 전우선 기자 foloj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