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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외교의 핵심은 사대<事大>나 특권이 아닌 애민<愛民>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9/09/24 [16:23]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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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선생 초상화   © 비전성남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정조 연간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실학자이자 개혁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홍대용, 박제가, 박지원, 이덕무, 서호수 등 웬만한 실학자들이 한 번쯤 다녀왔던 중국사행을 일생동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1799년(정조 23) 그의 벗 한치응(1760~1824)이 진하 겸 사은사의 서장관(書狀官: 사신을 따라 보내던 기록 담당 임시 벼슬)으로 뽑혀 연행을 하게 되자 뽐내는 얼굴빛으로 정약용에게 자주 자랑 삼았던 모양이다. 이에 정약용은 한치응을 전송하며 아래와 같은 글을 지어 벗의 들뜬 맘을 자제시켰다.

“장성(長城)의 남쪽, 오령(五嶺)의 북쪽에 나라를 세운 것을 ‘중국(中國)’이라 하고, 요하(遼河)의 동쪽에 나라를 세운 것을 ‘동국(東國)’이라 한다. 동국 사람으로서 중국을 유람하는 것을 감탄하고 자랑하고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나의 소견으로 살펴보면, 이른바 ‘중국’이란 것이 ‘중앙[中]’이 되는 까닭을 모르겠으며, 이른바 ‘동국’이란 것도 나는 그것이 ‘동쪽’이 되는 까닭을 모르겠다. 대체로, 해가 정수리 위에 있는 것을 ‘정오(正午)’라 한다. 그러나 정오를 기준으로 해가 뜨고 지는 그 시각이 같으면 내가 선 곳이 동·서의 중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북극은 지면에서 약간 도(度)가 높고, 남극은 지면에서 약간 도가 낮기는 하나, 오직 전체의 절반만 된다면 내가 선 곳이 남북의 중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동서남북의 중앙을 얻었으면 어디를 가도 중국 아님이 없으니, 어찌 ‘동국’이라고 한단 말인가. 이미 어디를 가도 중국 아님이 없으니 어찌 별도로 ‘중국’이라고
한단 말인가.


이른바 ‘중국’이란 무엇을 두고 일컫는 것인가. 요·순·우·탕의 정치가 있는 곳을 중국이라 하고,공자·안자·자사·맹자의 학문이 있는 곳을 중국이라 하는데 오늘날 중국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성인(聖人)의 정치와 성인의 학문은 동국이 이미 얻어서 옮겨왔는데, 다시 멀리에서 구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이 글에서 정약용은 당시 중국 사행을 조선인이 누리기 힘든 특권으로 간주하고 이를 자랑하거나 부러워하는 세태를 비판하며, 흔히들 중국을 중앙으로, 조선을 동국(東國)으로 지칭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중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개념으로 자신이 딛고 서있는 곳이 바로 중앙이며, 진정한 중국이란 성인의 정치와 학문이 실현되는 곳이라 일갈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생각은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대의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로 간주하는 공리공론에서 비롯된 것은 결코 아니다.

정약용이 1800년 진하 사행의 부사로 청나라로 떠나는 이기양 (1744~1800)에게 과거 문익점이 목화씨를 얻어와 민간에 전했던 것처럼 이용후생(利用厚生) 할 수 있는 문물을 전래해 국은에 보답하라고 권면한 대목은 중국 사행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정확히 드러나있다.
 
이는 중국을 비판 없이 사대(事大)하는 조선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이자 나라의 혜택으로 다른 문명을 접하러 가는 사행이라면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문물을 배워오고 전달할 것을 고민해야 한다는 민생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오늘날도 다산이 살았던 시대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처지를 생각할 때, 다산의 패기 있는 ‘중국(中國)’ 개념과 외교의 핵심을 애민을 바탕으로 한 이용후생 및 경세치용에 두는 가치관을 한 번쯤 되새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