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특별기고] 성남 천림산봉수 복원 완료, 평안화 오르는 세상을 기원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9/10/23 [14:35] | 본문듣기
  • 남자음성 여자음성

 
▲ 천림산 봉수지(복원 후)     © 비전성남

수정구 금토동 산 35번지에 위치한 성남 천림산봉수 복원사업이 9월 24일 완료됐다. 봉수(烽燧)란 횃불(烽)과 연기(燧)로써 변방의 군사정보를 중앙에 알리던 통신 시설이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화포나 북, 나팔, 깃발로 알리거나 봉수군이 직접 달려가서 보고했다. 이때연기를 피우는 데 이리 똥을 사용했기 때문에 낭화(狼火) 또는 낭연(狼煙)이라고도 했다.

『경국대전』에 평화로운 날에는 1개의 홰를 올리고, 적이 멀리 나타나면 2홰, 경계에 접근하면 3홰, 경계를 침범하면 4홰, 전투가 벌어지면 5홰의 봉수를 올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1개의 신호를 평안화 또는 태평화라 부르기도 했다.

봉수를 올리는 시설물을 봉수대 혹은 연대(煙臺)라고 하며, 근대적 통신 시설이 사용되기 이전 시대에는 가장 빠른 통신수단으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12시간이면 신호가 도달했다.
 
조선시대 봉수제도는 전국에 다섯 개(5炬)의 직봉(直烽)노선을 배치하고, 직봉노선을 연결하는 간봉(間烽)노선을 배치해 거미줄처럼 통신망을 구성했다. 다섯 개의 봉수 신호체계는 오늘날의 마이크로웨이브 통신체계의 원조라고 평가된다.
 
천림산 봉수는 천천산(穿川山)·천천현(穿川峴)·월천현(月川峴) 봉수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 후기부터 천림산봉수로 불렸는데, 이처럼 이름이 다르게 기록되기는 했지만 위치의 변동은 없었다.
 
천림산봉수는 다섯 개 직봉 노선 가운데 두 번째 노선의 마지막 전달 봉수였다. 부산 다대포진 응봉에서 시작돼 용인 석성산봉수를 거쳐 천림산에서 그 신호를 전달받아 서울의 목멱산(남산)봉수에 전달했다. 천림산봉수의 근무인원은 홍경모가 편찬한 『중정 남한지(重訂南漢志)』에 봉수군 25명과 그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75명의 인원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천림산봉수는 우연한 기회에 위치가 알려졌다. 1995년에 광복 50주년 기념 통일기원 봉화제가 열렸는데, 당시 성남시의원과 성남문화원이 공동으로 제1회 봉화제를 인릉산의 ‘봉화뚝’이라 불리는 곳에서 개최했다. 이듬해 제2회 봉화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윤치장 의병장의 증손자인 윤효상 씨가 현재 위치를 제보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1999년 10월에는 전국 최초로 봉수 학술회의가 성남문화원 주최로 열려 학술적 가치를 규명했고, 이어 한국토지공사(LH)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2002년 9월 경기도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됐다.
 
이후로도 성남문화원이 타 지역 봉수 유적 300여 곳을 조사하는 등 지속적인 연구가 이뤄졌고, 연조(煙竈, 굴뚝) 5기 중 바닥부분이 뚜렷한 1기를 제외한 4기의 연조와 방호벽, 담장시설을 복원하고 광복절 날 연기를 피워 올리는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9월 24일 준공식을 갖게 됐다.

윤종준 성남학연구소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