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 년 사회복지를 위해 한길만 걸어오다
2019년 10월 22일, 헌신과 사랑으로 서민과 함께했던 사회복지의 대부 양친회 초대 이사장 김경모(90) 선생이 영면에 들었다.
“선생은 지난 60여 년을 낮은 자리에 스스로를 두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을 가장 숭고하게 여기고 살아오신 분입니다.” 1972년, 경제·사회 측면에서 낙후 지역인 성남(당시 광주군 동부면)에 무료탁아소와 무료진료소 운영을 시작으로 우리지역 사회복지를 위해 한길만 걸어온 고 김경모 선생은 1930년 함경남도 흥남시 서호리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25전쟁을 겪으며 혈혈단신 남하한 선생은 살아남기 위해 막노동은 물론 안 해본 일 없이 다하다가, 양친회와는 1955년 양친회(부산) 번역사로 취직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절망 대신 희망을 선택한 삶 생전에 선생은 “남한도 북한도 내겐 정말 힘든 곳이었다. 그렇다고 이 땅을 등질 수 없었다”며 양친회에 몸담고 일하면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이 정말 숭고하고 보람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고, 그래서 이것을 일생의 업으로 삼기로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사회적 약자의 절망을 대신할 사회복지의 희망을 선택했던 선생은 1963년 한국인 최초로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돼 클리블랜드 국제프로그램(CIP)에 참가하기도 했다. 평소 선생은 “누구 한 사람도 소외됨이 없이 골고루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사회의 건설이 더욱 시급하며, 이것이 진정한 복지국가로 가는 길이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진정한 복지국가를 위한 선생의 행보는 1976년 7월 양친사회복지회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 더욱 바빠졌다. 성남시 최초의 종합병원 양친회 병원 개원 1977년엔 성남시 최초의 종합병원 양친회 병원(20병상)을 개원했다. 1979년 6월 양친회 한국지부 사업 종결로 철수했지만 병든 자, 가난한 자, 약한 자를 위한 선생의 관심과 사랑만큼은 변함없이 진행형이었다.
1984년 4월 성남시로부터 소망재활원 시설인가, 1991년 11월 정성노인의 집 개원, 1992년 2월 양친회병원의 명칭을 ‘성남중앙병원’으로 변경, 2016년 11월 서호주간보호센터 설립 등 선생은 “사회복지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사회를, 남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며 몸소 실천하면서 사회복지의 역할을 재정립했다.
“저의 꿈은 이 민간 사회복지 각 기관이 정말 우리 국민들한테 피부에 와 닿도록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그리고 제 목적은 우리가 가장 모범적으로 잘 운영해서 우리나라를 이끌 수 있는 그런 민간 사회복지단체로 마지막까지 노력하는 것입니다” - 소망재활원 뜨락음악회 인사말 中 결코 잃고 싶지 않았던 우리지역의 큰 어른, 김경모 선생 2년 전 『비전성남』과 인터뷰 당시, 독자들에게 전했던 선생의 말씀이, 웃음이 아직도 생생하다.
“살아 보니 약간 부족한 듯 여기는 것이 최곱디다. 너무 없으면 비굴해지지만 부족한 듯해야 겸손해지고 부족한 듯해야 열심히 노력하게 되지요. 하하하”
유가족이 전한 선종의 마지막 말씀은 "부의금도 화한도 받지 마라, 김경모 관련해 어떤 상도 만들지 마라. 법인 직원들은 참 힘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다. 모두가 늘 수고한다”였다고.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 고 김경모 선생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고 김경모 선생의 발인은 10월 24일 오전 8시[장지 : 소망수양관(경기도 곤지암 소재)] 취재 정경숙 기자 chung0901@naver.com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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