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은 10월 8일부터 장서각에서 ‘조선 왕실의 비석(碑石)과 지석(誌石) 탑본(搨本)’ 특별전을 열고 있다.
※ 탑본: 석비와 목판을 먹으로 찍어내거나 글씨를 베껴 쓴 것.
장서각(藏書閣)은 광해군~대한제국 300년 동안 제작된 조선왕실 탑본 556점을 소장 중이다. 왕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표석(表石)과 신도비(神道碑), 죽은 이의 생애를 기록해 땅에 묻은 지석(誌石) 탑본 498점, 조선왕실의 창업과 관련한 곳이나 국난을 극복한 곳 등 기념비적 장소에 세운 기적비(紀蹟碑) 탑본 58점 등이다. 창덕궁 봉모당(奉謨堂)에서 옮겨온 것으로, 장서각에서 유일하게 소장하고 있다.
조선왕실의 탑본은 문예에 뛰어난 찬자(撰者)가 글을 짓고, 당대의 명필이 쓰고, 최고의 장인이 돌을 다듬어 글자를 새기고, 이를 탑본해 아름다운 문양의 비단으로 꾸민 것이다. 당대 글씨와 장황의 아름다움, 수준 높은 제작 기술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장서각 소장 탑본은, 시간이 지나면서 마모되거나 땅에 묻히고 글을 새로 새기기 위해 깎이면서 그 원형을 잃은 비문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땅에 묻는 지석은 발굴을 하지 않는 이상 그 원형을 알 수 없으나 장서각의 탑본을 통해 그 크기(가로 약 150㎝ × 세로 약 150㎝)와 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 이번 특별전은 장서각 소장 조선왕실 탑본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유물 50여 점을 선정, 일반에 최초로 공개하는 전시다.
전시실 초입에서 관람객들을 정면으로 맞이하는 ‘태종대왕 헌릉(獻陵) 신도비 탑본’. 탑본 중 가장 크다. 그 장엄함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의 헌릉에 세워진 신도비를 종이에 인출한 뒤 비단으로 장황했다. 현재 헌릉에는 2기의 신도비(보물 제1804호)가 있다. 본래의 신도비는 1424년(세종6)에 세워졌으나, 전란을 거치면서 내용을 알 수 없게 훼손되자 1695년(숙종21)에 본래의 비를 기조로 중각했다. 전시된 탑본이 이 중각비 탑본이다. 앞면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공덕, 여러 빈과 후궁, 태종의 자손 등에 관한 글이며, 뒷면은 ‘태종헌릉지비(太宗獻陵之碑)’라고 쓴 제액(題額)과 함께 비 건립 내력, 개국‧정사‧좌명공신의 명단을 기록했다.
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靖嬪李氏, 1694~1721)는 영조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후에 진종(眞宗)으로 추대되는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1728)다. 정빈 이씨 묘비를 세울 때 영조가 직접 글을 썼다. 표격지는 비문을 정사(淨寫)해 한 글자씩 오려 방안지에 배열한 것이다. 내용은 현존하는 비문과 같으나 몇 글자가 빠지거나 바뀐 곳이 있다. 비석의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정빈 이씨 묘비 탑본’은 ‘有明王朝靖嬪/含城李氏之墓’라고 쓴 전면과 정빈 이씨의 생애를 간략하게 기술한 음기(陰記, 후면)를 분리해 2개의 족자로 만들었다. 비석과 지석의 석재는 질이 좋은 충청도 김천과 충주의 돌을 주로 이용했다. 돌을 일정한 길이와 두께로 잘라 다듬고, 정으로 쪼고 표면을 갈아낸다. 그 위에 글자 수에 맞춰 행과 칸을 배열한 뒤, 얇은 종이를 얹어 붙이는 북칠(北漆)의 과정을 거쳐 돌에 붙인다. 각자장(刻字匠)이 비를 새기는 작업을 완료하면 표면에 종이를 붙여 먹으로 찍어낸다.
의릉(懿陵)에 매안한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 魚氏, 1705~1730)의 지문(誌文)을 종이에 인출한 뒤 문양이 있는 비단으로 상‧하 2본의 족자로 장황했다. 지문에는 선의왕후의 가계와 성품, 경종에 대한 정렬(貞烈)과 의릉에 합봉한 사연, 그리고 후대에 경종과 영조 사이를 의심하고 음해하는 세력에 대해 통탄하고 적극적으로 영조를 변호하던 모습 등을 기록했다. 이 탑본은 현재 장서각에 소장된 자료 중 당시의 장황 형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 중의 하나다.
장황(裝潢, 粧䌙)은 그림이나 글씨 등 서화에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족자·병풍·두루마리·책첩 등의 형태로 꾸미는 표지장식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광해군~대한제국 동안의 조선왕실의 장황 형식의 변천을 파악할 수 있다. 영조 대 초기까지는 복숭아‧석류‧포도‧연꽃‧난초 등 아름답고 다양한 문양으로 직조된 비단으로,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았던 영조 대 후기부터는 무문(無紋)의 비단으로 바뀐다.
그동안 장황과 관련된 용어는 여러 가지가 혼용됐는데, 이번 특별전을 통해 용어들을 정리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채 제작된 족자 장황에 전통적인 모범 답안을 제시해 현대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시각화했다.
효종의 영릉(寧陵)을 건원릉(建元陵. 경기도 구리) 서쪽에서 여주의 세종 영릉(英陵) 옆으로 천봉(遷奉)하면서 청화백자 지석을 시험 삼아 번조한 것이다. 지석도 처음 능을 조성할 때는 판석에 지문을 새겼다. 그러나 천릉할 때 천릉의 내용을 포함한 지문을 새롭게 판석에 새기고 동시에 같은 내용을 청화백자로 구워서 함께 매안했다. 『〔효종영릉〕 천릉도감의궤』의 「석지석소수본질(石誌石所手本秩)」과 「사지석소수본질(沙誌石所手本秩)」에 그 제작 과정이 기록돼 있다. 서사관 3명이 각각 첫 장을 1편씩 써서 번조한 것을 어람(御覽)한 뒤 서사관 1명을 정해 나머지 지문을 모두 서사하도록 했다. 「사지석소」 7월 30일에 3편을 구웠는데 1편은 글자가 희미하고 도편이 갈라졌으며, 나머지 2편 중 1편은 번조과정에서 안료가 산화돼 글자가 희미하게 나타났다고 했다. 이때 어람한 것이 장서각에 소장돼 있는 3장의 청화백자 지석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1편의 지석은 번조 과정에서 왼쪽에 갈라진 부분이 발견되며, 나머지 2편 중 하나도 글자가 희미하다.
기적비 탑본은 북방지역에 대한 조선왕실의 새로운 역사인식을 보여준다. 대부분 북한의 개성‧함경도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기적비의 탑본은 숙종~고종 대에 이르는 왕실 추숭사업의 결과로서 중요한 자료다. 특히 북한에 소재하는 비석의 경우 현재 비석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문헌의 기록과 장서각의 탑본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태조(太祖)가 책을 읽던 독서당(讀書堂)에 세운 비를 인출한 뒤 전면과 음기를 하나의 족자로 장황해 만든 탑본이다. 독서당은 태조가 독서를 하던 초당으로 함흥 귀주의 설봉산에 있다. 숙종이 1716년(숙종42)에 비석을 세웠고 정조가 1797년에 다시 중수하면서 직접 글을 짓고 써서 비석을 새로 새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昔我聖祖肇國在北方 옛날 우리 성조께서 북방에서 나라를 일으키시고 維日劬書于雪峯之堂 날마다 설봉 서당에서 독서하시면서 遂基我子子孫孫萬年維王 우리들 자자손손 만년 왕의 길을 터놓으신 것이다 載穹石以銘章 그리하여 큰 비에다 이 명을 새겨 揚大烈而覲耿光 그 큰 공로를 빛내고 그 경광을 뵈오려는 것이다 함흥부(咸興府)에서 동쪽 15리쯤 되는 곳에 마을이 있는데 이름이 귀주(歸州)이고, 산이 또 있는데 산 이름은 설봉(雪峯)이다. 거기가 바로 우리 왕업의 발상지로서 우리 성조께서 시냇가 반석 위에다 초당을 지어 놓고 그 안에서 독서하시다가 왕위에 오른 후 경흥전(慶興殿)을 지었는데, 전과 초당과의 거리는 약 3리 정도로 가깝다. 이 소자가 왕위를 이어받은 지 21년이 되는 정사년 10월에 비를 세워 ‘독서당구기(讀書堂舊基)’라고 삼가 쓰고는 이어 이상과 같은 명을 새긴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 특별전시 ‘조선왕실 비석과 지석 탑본’은 12월 21일까지 열린다. 월~토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관람할 수 있으며 일요일은 휴관이다. 전시 문의 031-730-8820 취재 전우선 기자 folojs@hanmail.net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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