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亂之肇 큰 난리가 일어날 즈음이면 人爲時出 인걸이 때에 맞추어 일어나니 晟奠唐社 이성(李晟)은 당나라 사직을 안정시켰고 葛復漢室 제갈량(諸葛亮)은 한나라 왕실을 회복했습니다. 後千百載 천백 년이 지난 뒤 合爲一人 이 두 사람이 합쳐 한 사람이 되어 以靖島氛 섬 오랑캐의 재앙을 다스렸으니 時在壬辰 때는 임진년이었습니다. 이 글은 1792년 8월 정조가 이순신을 제사지내며 지은 제문이다. 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날 즈음 그 어려움을 감당할 인물로 이순신이 그와 같은 충신이자 명장이라는 것이다. 이성(李晟)은 당나라 주자(朱泚)의 난을 평정해 서울 장안을 수복했고, 제갈량(諸葛亮)은 삼국시대 한나라 충신인데 이 두 사람이 이룬일을 이순신 한 사람이 성취했다고 극찬한 것이다. 정조는 1792년 직접 제문을 지어 전라도 강진현 탄보묘(誕報廟)에 관리를 보내 진린, 명나라 부총관등자룡(鄧子龍)과 이순신을 함께 제사지내게 했다. 탄보묘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도독인 진린(陳璘)이 이곳에 있으면서 중국 사람들이 전쟁의 신으로 섬기는 관우(關羽)의 신력을 빌리고자 세운 사당이다. 탄보묘가 위치한 강진현은 지금의 완도군 고금면이다. 완도 고금도는 정유재란 때 충무공이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겨 설치했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의 시신을 임시로 매장했던 곳이다. 정조가 직접 짓고 글씨를 쓴 제문의 원고가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돼 있다. 큰글씨로 호방하게 쓰고 수정한 이 원고는 말년 정조의 필력을 느낄 수 있다. 이순신에 대한 정조의 추앙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었다. 1794년 정조는 이순신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충청도 아산에 있는 그의 무덤에 세우게 했다. 이 신도비의 윗부분에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는전액(篆額)을 써서 새기게 했다. 그런데 정작 정조는 이 신도비명의 글씨를 쓰지 않았다. 정조는 충신의 비문은 마땅히 충신의 글자로 써야 한다고 생각해 당나라의 충신이었던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를 집자해 새겼다. 국왕이 짓고 글씨를 써서 비를 세우는 것은, 죽은 이에게 영예이지만 이순신만큼은 그보다 더한 영광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충신이라는 명예를 얻어도 부끄럽지 않고 그에 대해 아무리 포상을 해도 과하지 않는 이가 바로 이순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국왕들은 이순신을 현창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시행했다. 그럼에도 정조가 다시 이순신을 추앙하는 사업을 펼친 것은 끝없이 추앙해도 결코 과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위의 제문을 지을 당시 정조는 이순신의 유사(遺事)를 읽고 있었다. 이순신과 관련된 글들이 책으로 편찬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긴 정조는 글을 모아 편찬할 것을 명하며 자신의 내탕고(內帑庫) 재물을 보태게 했다. 마침내 1795년 11월 이순신이 지은 시문과 난중일기는 물론 그와 관련 기록들을 엮어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8책을 완성했다. 그해 12월 정조는 경상도 통영의 충렬사(忠烈祀)에 관리를 보내 다시 제사를 지내며 『이충무공전서』 한 부를 보관하게 했다. 이때 지은 제문에서 이순신의 <진중음(陣中吟)>을 따와 ‘바다와 산에 맹서하니, 초목도 그 이름을 알았네(誓海盟山, 草木知名)’라고 칭송했다.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 아니면 시대가 영웅을 나오게 하는 것인가? 시대와 영웅의 출현에 대한 논의는 옛사람들도 고민한 주제였다. 정조는 단언했다. 이순신이야말로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하늘이 낸 영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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