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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영웅, 소환되다! 송상현의 임란 순절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0/05/26 [12:33]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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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상현을 추모하는 충렬사가 있는 충북 청주의 강상촌     © 비전성남
 
난세에 영웅이 태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영웅은 만들어진다고도 한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주로 전란에서 나라를 구한 인물을 영웅으로 기억하고 또 소환한다. 오죽하면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이라는 시쳇말로 영웅을 기다릴까?
 
조선 최고의 영웅은 이순신이었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영웅상과 영웅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대표적 인물이 바로 송상현(1551∼1592)이다.
 
송상현은 26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관을 역임한 문관이었다. 임진전쟁 직전 동래부사로 부임했다. 그는 1592년(선조 25) 4월 15일 왜적이 쇄도하자 동래부민을 결집해 3중으로 성을 포위한 적을 상대로 항전하다 전사했다. 그의 죽음 소식은 전쟁 중 급속하게 전파됐다.
 
부산포가 함락되고 잇달아 동래부사 송상현이 살해되었다. 나머지 군관과 사졸들도 죽은 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상주 의병장 곽수지의 『호재진사록』 중에서).
 
그가 동래부에서 ‘살해’됐다는 언급은 왜군의 세력에 대한 공포를 담고 있다. 당시 선조는 그가 항복했다는 의심을 품고 조사를 지시하기도 했다. 다행히 경상 감사의 확인 결과 ‘전사’했다는 사실로 정리됐다. 이듬해 상황은 조금 달라져 전쟁 중 영웅이 필요했다.
 
그러자 그의 죽음에 ‘충의(忠義)’의 가치를 부여하고 포상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됐다. 급기야 송상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왕을 향해 예를 다하며 최후를 맞이한 영웅으로 묘사됐다. 전쟁에서 국왕을 위해 끝까지 절의를 지키는 영웅이 필요했고, 여기에 송상현이 소환된 것이다.

시간이 흘러 또 다른 위기가 닥쳤다. 청나라의 부상에 이은 두 차례에 걸친 호란은 조선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이런 위기와 치욕을 씻기 위해 이른바 ‘북벌’이라는 구호가 등장했으며, 당시 사람들은 이를 위한 새로운 영웅을 고대했다.
 
송시열(1607∼1689)이 구심점이었던 북벌운동에 송상현은 영웅으로 다시 소환됐다. 효종의 즉위로 전격 기용된 송시열은 송상현을 청주 유정서원에 향사하고, 뒤에는 이 서원을 국가 공인 사액서원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송상현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성에 올라 독려하다 성이 함락되면서 갑옷 위에 조복을 입고 죽음을 기다렸다. …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라는 시를 아버지께 보냈다.… 왜군도 그의 죽음을 의롭게 여겨 시체를 관에 넣은 뒤 표시를 세웠다…(송시열의 『송자대전』에 수록된 글 중에서).
 
송시열은 송상현의 죽음을 ‘효’보다 ‘충’을 앞세운 ‘순절’로 규정하고 그의 절의가 왜군들마저 감화시켰다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송상현이 그러했듯이 북벌이라는 대의에 발 벗고 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인재를 기다렸다.
 
송상현이 영웅으로 소환되자 이제 그와 인연이 있던 전국 각지에 사당이 건립되고 그를 충절의 영웅으로 추모했다. 17세기 중엽 송상현은 바로 북벌을 위한 영웅의 아이콘이 됐다.
 
우리는 영웅을 고대한다.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영웅들은 지하에 있지만, 과거가 아닌 오늘의 의미로 추모하고 발견한다면 영웅은 항상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현충일, 바로 영웅을 소환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