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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단지 시절을 이야기하다] 정재택(75・태평3동) 어르신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살아”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0/11/24 [11:41]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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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어르신이 직접 지어 현재까지 거주 중인 단층집     © 비전성남

 
“비탈진 산의 껍질만 벗겨 놓은 상태인데 비가 내리면 그 땅이 어떻겠어요. 광주대단지 때 유행했던 말 중 하나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란 우스갯소리였어요.”
 
6·25 때 피난 가는 것처럼 광주대단지에 왔다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개천가 판자촌에 거주하던 정재택(75·태평3동) 어르신은 약 200세대 이웃들과 함께 한밤중 트럭에 실려 ‘광주대단지’로 이주했다. 1969년 10월이었다.

‘내 집이 생기는구나’란 희망 따윈 없었다. “쫓겨나는구나!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것 같아 서글펐다”고 한다. 도착한 곳은 단대리(현 단대오거리)였다. 그곳 천막촌에서 한 20일 살다가 ‘광주시 중부면 수진 13리(현 태평3동)에 약 17평 3홉’되는 딱지(분양권)를 받게 됐다. 당시 나이 25세, 결혼 전 어머니와 함께였다.
 

▲ 사진 배경 1972년. 저 뒤로 태평동이 보인다.     © 비전성남

 

▲ 1973년 사진 속 큰아들이 48세가 됐다.     © 비전성남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 딱지는 무용지물
수진 13리, 배급받은 군용천막에서 약 6개월을 살았다. 손수땅을 파서 지은 판잣집, 1975년엔 단층집으로, 집다운 집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리고 50여 년 세월을 1975년 모습 그대로인 단층집에서 살고 있다.
 
어르신처럼 무난하게 자리를 잡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단지로 옮겨온 사람 중 대부분은 딱지를매매하기 시작했어요.”

딱지를 받았지만 일자리가 없어 돈을 벌 수도, 집을 지을 수도 없으니 딱지는 무용지물이었다. 술집에서 술값으로 잡혀먹고, 밥집에서 밥값으로 대신했다. 돌고 도는 딱지를 헐값에 사들여 수십 장씩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
 
딱지를 잃은 사람들은 길가 유보지에 얼기설기 무허가 건축물을 짓고 살다가 쫓겨나고, 강원도 대성리 근방, 정부에서 마련해놨다는 곳으로 내몰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장례비가 없어 장례를 치를 수 없는 사람들
현재 태평초등학교 근처엔 넓은 면적을 차지한 조선시대 왕족묘지가 있었다. 죽은 아기를 놓고 어쩔 줄 모르는 부모를 대신해 합판으로 관을 짜고 자전거에 실어다 그곳 묘지 한쪽에 묻어준 것도 수차례, 마을에서 반장일을 보면서 기독청년연합회총무로 활동하던 때였다.
 
굶어서 죽은 사람, 병원비가 없어서 죽은 사람의 가족에게 장례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삼륜차를 빌리고, 교회 청년들을 동원해서 현재 영생관리사업소 앞 공동묘지에 묻어 준 기억도 허다하다.
 
비 내리는 날, 장화 없이는 걸어 다닐 수 없는 비탈길 위에 섰다
“그날도 비가 내렸어요.” ‘배가 고파 못 살겠다’, ‘일자리를 달라!’, ‘백 원에 매수한 땅 만 원에 폭리 말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날의 행동은, 쓰레기 하차하는 것처럼 버려졌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으며 생존권을 위한 항쟁이었다”고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 듯 전한다.
 
사상이 불손한 광주대단지 놈들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 대단지 주민들은 어딜 가나 환영받지못했다. 성남시 승격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광주대단지 또는 성남에서 왔다고 하면 “거지 동네, 도둑이 들끓는 무법천지에서 왔다”며 싫어했다.

대단지사건 이듬해 예비보충역으로 입대했는데 군생활 역시 녹록지 않았다. “사상이 의심스러운대단지 놈들이라며 당했던 가혹 행위는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며 말을 잇는다.
 
“그 서러움을 잊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았다. 반장으로, 통장,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며 성남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다”라고.
 
취재 윤해인 기자  yoonh110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