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주대단지 시절을 이야기하다] 오해봉 어르신의 억울한 울림

“ 내가 뭘 잘못해서 ‘전과자’란 낙인이 찍혀 50년을 죄인처럼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0/12/23 [16:38] | 본문듣기
  • 남자음성 여자음성

 
8.10 성남(광주대단지) 항쟁이 일어난 바로 다음 날, 1971년 8월 11일 이른 아침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순경들에 의해 그는 광주경찰서로 끌려가게 됐다. 잘못한 것도, 끌려갈 만한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은 그저 순수한 24세 청년, 오해봉이었다.

오해봉(74·용인 기흥) 어르신은 8.10 성남(광주대단지) 항쟁이 일어나던 날 성남출장소(현 이마트 뒤) 뒤편 언덕, 수천 명 군중 속에 있었다. 사건을 주동하지도,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
 
최소한의 인권만이라도 보호받고 싶어서 수천 명 군중과 함께 ‘먹고 살 수 있게만 해달라! 생존권만이라도 보장해달라!’는 구호를 따라 외쳤을 뿐이다. 그런데 50년 세월을 전과자란 주홍글씨를 새긴 채 죄인처럼 살고 있다.
 
소·돼지보다 못한 삶 속으로 던져졌다
광주대단지로 오기 전 오해봉 어르신은 서울 장위동 철길 가에 무허가 블록집을 짓고 살았다. 예고도, 기한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떨어진 철거명령에 의해 1969년 6월 29일 밤 짐짝 취급받으며 트럭에 실려 중동(현 중앙동) 돌다방 뒤편에 내려졌다.
 
군용천막 하나에서 생면부지 사람들, 두세 가구가 칸막이도 없이 함께 살았다. 사생활 보호나 인격 존중 따윈 없었다.

땅을 파서 물이 나오면 식수로 사용하고, 구덩이를 파고 가마니때기를 둘러 화장실로 사용했다. 벌목해서 줄 쳐 놓은 땅만 있을 뿐 집도, 물도, 전기도, 화장실도 없는 곳에 내동댕이쳐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그 무엇도 갖춰지지 않은 허허벌판에 암흑천지, 비가 오면 오물이 천막 안으로 쓸려왔고 악취는 코를 찔렀다. 굶주림 끝에 ‘산모가 아기를 삶아 먹었다’는 괴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어르신은 “우리는 소나 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어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머금는다.
 
1971년 8월 10일 성남출장소 뒤편 공터
아침부터 약 2시간 동안 비를 맞으며 양택식 서울시장을 기다렸다. 약속시간이 지나도 양택식 시장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엔 ‘차가 밀려서 올 수 없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많은 걸 원하지 않았다. ‘살 수 있게만 해달라, 생존권만이라도 보장해달라’였다. 아니, 하소연이라도 들어주길 원했다”라며 말을 잇는다.
 
“그런 상황이 일어나게끔 유도한 건 정부였고, 8.10 성남(광주대단지) 항쟁은 폭동도, 난동도 아닌 사람들의 살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양택식 시장 대신 검은 세단이 공터 앞으로 진입했고 화가 난 사람들은 검은 세단에 불을 붙여 물이 철철 흘러넘치는 개천에 밀어 넣었다. 어르신은 군중 속에 휩쓸려 수진리고개(현 태평고개)까지 따라다니다가 귀가했다. 다음 날 아침, 어르신은 죄인이 돼 있었다.
 
그에 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꼬리표처럼 달려있는 ‘전과자’
하지 않은 일도 “내가 했다”고 자백하게 만드는 게 고문이었다. 안 했다고 해도 강요와 고문에 의해 찍힌 지장은 죄인이란 낙인이 됐다.
 
죄명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죄를 지은 게 없기 때문이다. 6개월 후 출소는 했지만, 전과자란 낙인으로 인해 공장의 수위도 할 수 없었고, 먹고 살기 위한 경제활동에 제한이 따랐다.

그 이상의 혹독했던 삶은 그냥 가슴에 묻어두기로 했다. 다만, 전과자란 주홍글씨만은 지우고 싶다. 자식과 친척들 앞에서 당당해지고 싶은 게 어르신의 마지막 소원이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요. 누구라도 나서서 저의 억울함을 좀 풀어주세요”라고 말하던 어르신의 부탁이 머리에서 가시질 않는다.
 
취재 윤해인 기자  yoonh110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