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가 있었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단지 사업소 뒤에서 탄리 종점까지 이어지는 언덕배기 공터에 모인 사람수가 5만 명이 넘었다.
이 도시의 몇몇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로 11시에 오기로 한 서울시장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11시가 넘어 11시 반이 되어도 그 시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그녀들은 ‘속았다!’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면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분노한 군중들은 출장소 앞에 세워져 있던 관용 지프차를 부숴 독정천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그리고 사업소로 몰려가 기물들을 부수고 사업소를 불태웠다. 사업소 직원들은 도망쳤고, 경찰, 기동대원도 도망쳤고, 불 끄러온 소방차도 무서워서 돌아갔다.
드디어 이들은 최고 권력자를 소환했다. 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향했던 것이다.
수진리 고개 너머에는 서울시와 광주경찰서 연합기동대원약 천 명과 시민들의 대치선이 만들어졌다. 청와대행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을것이다.
다급해진 쪽은 정부였다. 그래서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이 도시에 대한 그들의 정책이 비인간적이었음을 인정했다.
(『성남시사』에서 정리)
이 사건을 치안본부장은 “광주대단지 난동사건”으로 명명했고 언론들은 그대로 따라 적었다. 그런데 이 이름에는 맥락이 생략돼 있다. 구조적 폭력에 대한 대항폭력. 그러니까 폭력과 정치경제학적 구조에 내재하는 연관성이 괄호 안에 숨어 생략됐다는 얘기다.
이 시선은 폭력을 물리적․가시적으로만 판단해, 모든 폭력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단층적이고 협소한 이해와 연결된다. 권력의 편협한 이름 붙이기는 그래서 2차 폭력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이 도시는 자신의 역사를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감추려고 했던 것이다.
이 도시는 이 사건의 효과로 ‘성남시’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1973년 7월 1일이다. 성남시는 ‘광주대단지사건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조례를 만들고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 위원회는 이 사건의 이름을 짓기 위한 학술회의를 열고 드디어 사건에 이름을 부여했다. “8.10 성남(광주대단지)항쟁”. 시민 주체들이 구조화된 폭력에 맞서 봉기하고 저항한 맥락이 살아 있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름은 기표이고 기표는 의미화에 연결된다. 그리고 의미화는 하나의 역사가 된다.
신축년 새해는 “8.10 성남(광주대단지)항쟁” 50주년이 되는 해다. 성남시는 이미 기념사업TF팀을 운영하고 있고, 추진위는 민관추진위원회 구성을 준비 중이다.
구체적인 기획안이 마련되기 전이어서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지만 사건의 의미를 문화와 예술 그리고 학술이라는 매체를 통해 전체 시민이 되짚어 보고, 하나로 어우러지는 도시축제로 마무리되는 방향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내가 이 사건을 30년 이상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이 사건에 내재해 있는 불가해한 에너지 때문이다. 상식적인 분노의 차원을 넘어서는 분노.
현장을 취재했던 어떤 기자는 이들의 눈빛에서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라는 차원을 얘기하고 있다. 여러 수준의 공권력들을 떨게 만들었던 어떤 실체의 출현 말이다.
이 에너지가 지금의 성남과 그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력이라고 나는 믿는다.
신축 새해 성남 만세! 성남시민 만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