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시는 우리나라 도시발전사의 모든 과정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며, 주민들이 스스로 행복한 삶터를 가꾸어 온 현장이다. 성남의 역사에서 1971년 8월 10일은 주민들이 헌법에 보장된‘인간 존엄과 국민으로서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요구한 날이다.
광주대단지는 서울의 무허가 판잣집을 철거하기 위해 1968년에 마련한 신도시계획으로 지금의 성남시 원도심지다. 6‧25 전쟁 이후 서울에는 무허가건축물이 급증해 60년대 후반에 13만6,650동으로 집계됐는데, 이들 일부는 아파트에 입주시키고 일부는 토지매입가격이 낮은 남한산성 자락의 한적한 산골 마을로 보낼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1969년 1년 동안 서울에 406동 1만5,840가구의 아파트가 건설됐고, 광주대단지에도 철거민 이주가 시작됐다.
난민촌 수준의 광주대단지는 일가족이 천막 속에서 얼어 죽기도 했고,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는데 일거리가 없었다. 굶주림 때문에 아기를 삶아 먹었다는 풍문이 돌 정도로 주민의 생활상은 참혹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이런 상황은 폭발 직전의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서울시장 김현옥은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이 있었고, 현장에 나갈 때 항상 ‘돌격’이라는 단어를 새긴 헬멧을 쓰고 다녔다. 그의 저돌적인 보여주기식 사업의 대표적인 사례가 청와대에서 잘 보이도록 마포 와우산에 아파트를 지은 것이다. 그런데 1970년 4월 8일 준공된 지 4개월밖에 안 된 5층짜리 와우아파트가 붕괴해 34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발생해 김현옥 시장은 사임했다.
철거민들에게 서울시는 1가구당 20평씩 평당 2천 원에 분양해 주고, 그 대금을 2년 거치 3년 상환토록 했으나, 부동산 투기 붐이 일면서 땅값이 평당 8천~1만6천 원으로 치솟자 땅값을 일시불로 내게 하고 취득세·재산세·영업세·소득세 등 각종 세금을 부과했다.
철거민 중에는 서울의 무허가 주택의 세입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에게는 ‘딱지’라고 불리는 입주증이나 천막조차 지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광주대단지 안에서 무허가로 판잣집을 짓고 살다가 다시 강제 철거돼 정착한 곳이 ‘달나라 별나라’로 불렸던 은행동 일대였다.
단지 안 무허가 판잣집은 5,121채에 달했다. 금광2동과 은행동지역을 자혜촌(慈惠村)이라고 불렀는데, 광주대단지에서 철거된 주민 4,300가구 2만여 명이 8평의 땅에 ‘삿갓집’이라고 하는 움막을 짓고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식구들이 포개서 자야만 했고, 재래식변소 6개를 공동사용해야 했다. 동아일보 1971년 10월 12일 <알몸월동>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런 처참한 생활상이 알려졌다.
1971년 8월 10일의 시위는, 주민들과의 면담을 약속한 양택식 서울시장(임기 1970. 4. ~ 1974. 9.)이 주민들이 모여 있는 현장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주민들의 분노에 불을 지른 결과였다.
주민들은 “모이자, 뭉치자, 궐기하자 시정(是正) 대열에!”라는 구호를 적은 전단지를 돌려 군중을 모았다. 격분한 주민들은 “배고파 우는 사람 세금으로 자극 말라”, “일자리를 달라”, “천 원에 매수한 땅 만 원에 폭리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비가 내리는 중인데도 출장소와 관용차·경찰차를 불태우고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항쟁을 전개했다.
‘난동’, ‘폭동’ 등으로 표현됐던 이 사건은 주민들이 국민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한 것이었다. 헌법 제10조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주민들의 봉기는 인간의 기본적존엄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보장되지 않은 광주대단지라는 황무지 생활환경이 원인이 된 것이다. 잘못된 철거민 이주정책을 바로 잡고자 한 주민들의 항쟁이었다.
올해는 1961년부터 시작된 모란개척 60주년이 되고 8‧10 성남(광주대단지)민권운동 50주년이 됐다. 우리 고장 주민들이 스스로 행복을 추구해온 역사를 되돌아보며 더욱 살기 좋은 성남시를 만들어 가야겠다.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