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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역사이야기·금토동(2)

  • 관리자 | 기사입력 2010/10/21 [13:50]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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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스스로 천주교 신앙의 싹 틔워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세기 말이다. 
외부로부터 신흥종교가 들어오게 되면 외국인 선교사가 파견돼서 선교활동을 중심으로 종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천주교는 외국인 선교사가 아닌 우리민족 스스로 천주교 신앙의 싹을 틔웠다.
1779년(정조3년), 경기도 퇴촌면 천진암(현재 한국 천주교 발상지)불교 사찰에서 권철신·권일신 형제를 비롯해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남인 학자 이벽 등이 천주교 ‘강학회’를 열었다. 실학파 지식인이자 초기의 신앙인인 이들은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들 편에 들여온『천주실의』, 『칠극』등의 천주교 교리서를 읽게 됐고, 학문적 호기심으로 받아들여 연구되던 천주학 또는 서학(西學)을 종교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1784년, 이승훈을 북경 천주회로 파견해 프랑스의 그라몽(Grammont) 신부에게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했다. 많은 교리서와 성서, 그리고 성물을 가지고 귀국한 이승훈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지금의 명동 성당 부근의 명례방(이벽의 집)에서 정기적인 신앙집회를 갖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됐다.

처참했던 천주교 박해의 흔적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 유교사상이 근본이었던 조선왕조의 지배계층은 ‘모든 사람은 천주앞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지 않는 천주교를 용납하지 않았다.

천주님 앞에 만인은 평등하고 형제·자매라는 것과 제사를 지내지 않는 천주교의 교리는 효도를 강조하는 유교 이념과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유지하던 조선사회에서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워 수차례의 박해를 받게되기에 이른다.

천주교 박해는 처음부터 처참했다. 1801년의 신유박해를 비롯해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로 수많은 사람이 순교했다. 

그 중 남한산성 성지와 금토동 청계산 성지에서도 많은 순교자가 있었다. 남한산성은 신유박해 때 광주 의일리(현재의왕시)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가 체포돼 1801년 12월 28일(음력) 동문 밖에서 처형됐다. 

또한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 강완숙 등이양평·광주 일대에서 검거되고 남한산성에서는 300여 명이 순교했다. 기해박해에는 새로운 교우촌으로 성장한 미사리 구산마을의 김만집(金萬集), 김문집(金文集), 김주집(金胄集)과 그의 아들들, 병인박해 때는 김성희(金聖熙), 김차희(金次熙)등 40여 명이 순교했고 전국적으로 2천여명이 순교했다.

금토동 청계산의 성인 서루도비꼬 성지

금토동에서 청계산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정일당 강씨 사당과 묘역을 지나 청계산의 여러 봉우리 중 하나인 국사봉을 만날 수 있다.

산등성이를 따라 죽 이어진 선을 한발 한발 밟아 올라가면 국사봉 못 미쳐 작고 음습한 동굴터(사진)가 있다. 그곳은 흥선 대원군 집권 당시 프랑스의 서루도비꼬 볼리외(1840-1866, 한국이름 서몰례) 신부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은거했던 곳이다.

동굴 입구에 성인(聖人) 서루도비꼬 볼리외 신부의 약력을 적은 안내판과 표석 2기가 세워져 있는 이 터는 어른 4·5명이 간신히 은거할 수 있는 좁은 공간의 동굴로 출입구가 북향이라 어둡다. 

동굴 바깥은 높이 1m, 직경 320㎝로서 낮고 좁은 편이고 내부는 높이 120㎝, 직경 480㎝, 폭 5m정도다.

1865년 5월 27일, 충청남도 내포리에 상륙해 약 3주일 후 선교를 위해 묘루니(운중동)에 도착한 신부는 흥선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 굴에 숨어 지내며 선교활동을 했다. 그러다1866년(병인년) 2월 체포돼 3월에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성인 서루도비꼬 신부는 1900년 9월10일 서울 명동 대성당에 안장됐다. 매년 9월 순교성월이 되면 천주교 신자들이 이 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순교 성인의 뜻을 기린다.

가장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지속돼 수많은 순교자를 낸 박해가 병인박해다. 

당시 순교한 신자는 대략 8천 명에서 1만 명으로 추산되고 대부분 이름을 알 수 없다.

도심과 인접해 쉽게 등산로를 따라 산행할 수 있는 청계산 작은 동굴터. 물방울이 간헐적으로 뚝뚝 떨어지는 그곳에 ‘서몰례’라는 한국이름을 가진 프랑스 신부가 숨어서 쉬었을 숨결이 청계산 자락 골마다 깊게 배는 것 같다.

자료제공|성남문화원
도움말|윤종준 상임연구위원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조민자 기자 dudlfd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