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남한산성이 국운을 가름했던 역사의 중심지이며, 성내에 임금이 머물던 행궁이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임금이 지방민들의 민심을 살피거나, 위로하기 위해 도성 밖 나들이를 행행(行幸)이라고 한다. 도성을 떠나 지방으로 이동할 때 각 고을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행복한 발걸음이기 때문이다. 행행은 며칠 정도 단기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신병치료나 선왕에 대한 능행차 시 또는 반란이나 외침 시 피난하기 위해 떠나는 경우에는 몇 주에서 몇 달씩 장기간 이루어지기도 했다. 남한산성행궁은 인조반정 성공 이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을 계기로 한양 근처에 임시로 피난할 수 있는 보장처를 찾다가 남한산성에 1624년부터 옛 성터(통일신라 주장성(晝長城))를 따라 다시 쌓고,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 동쪽으로 성내가 한눈에 보이는 자락에 동향해 1625년부터 이듬해까지 남한산성행궁을 건립했다. 일본군이 파괴한 행궁, 100여 년 뒤 복원 17세기 말 고지도를 보면 행궁은‘目’자 형태로 담장을 두르고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궐내각의 공간(外朝)과 공식적인 정무의 공간(治朝), 침전이있는 공간(燕朝)으로 사용했다. 이후 유사 시 종묘의 위패를 보관할 수 있는 좌전이 숙종 때 건립되고, 좌승당과 일장각과 같은 유수부의 관청시설이 순조 때 들어서는 등 조선후기에는 상궐 72.5칸, 하궐 154칸, 좌전 26칸 등 총 252.5칸 20여동의 건물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명성황후 시해 후 을미의병이 나라를 지키자며 남한산성으로 모여 서울진공작전을 펴고 어렵게 상황을 수습한 일본군은 남한산성행궁을 비롯해 성내의 무장해제를 위해 철저히 파괴하게 된다. 그리고 100여년이 지나 각계의 노력으로 행궁은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나게 됐다. 남한산성행궁 복원공사는 옛 부재의 사용이 매우 중요하다. 20세기 초 폐허가 된 행궁에 방치된 건물들중 목재는 점차 썩어 넘어지고, 석재들도 하나 둘씩마을에 소산됐다. 특히 남한산성의 외대문인 한남루에 사용된 장주초는 인근 초등학교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공사 전 마을에 있는 흩어져 있는 행궁과 관련된 석재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원위치를 알 수 있는 석재를 선별해 행궁복원에 적극 활용했다. 2010년 10월, 행궁 윤곽 드러내 이 때문에 행궁 곳곳에 기존 원형의 석재가 다수 재사용됐으며, 보충석 역시 석재의 가공을 원형의 돌과 같이해 모조품에서 진품 쪽으로 조금이라도 가깝게 갈 수 있었다. 목재 역시 수입목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모두 국내산 육송을 들여 사용했고, 사진으로 확인되는 부분은 구조재부터 조각이 있는 수장재까지 비슷하도록 노력했다. 2010년 10월로 다시 태어난 남한산성행궁은 그윤곽을 드러낸다. 물론 목재의 수축 등을 고려해 내년 외부단청공사가 남았지만 지금으로도 서울에 있는 궁궐을 대신해 보장지였던 역할을 충실히 해오던 그 모습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제 행궁은 행재소나 읍치의 용도로 사용되지 않지만 통일신라 때부터 지켜온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다시 이야기하는 공간으로 활용될 것이다. 또한남한산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라는 또 하나의 목표에 적극 다가설 것이며, 이를 계기로 잊혔던 남한산성의 역사가 다시 태어나고 재해석되기를 기대한다. 노현균 |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문화유산팀장 ※ 이번호부터 남한산성 이야기가 몇 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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