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은 그의 수많은 저서 중 국방체제에 관하여 쓴『민보의(民堡議)』에 우리나라 산성을 설치할 만한 지형으로 산봉우리의 형태에 따라 4가지로 구분했다. 첫째는 고로봉( 峯)형으로 사방의 가장자리가 높고 중앙이 꺼진 분지와 같은 형태이며, 둘째는 산봉(蒜峯)형으로 산정상부가 평탄하고 넓으며, 사방의 가장자리가 두절된 형태다. 셋째는 사모봉(紗帽峯)으로 크기가 다른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 형태로 봉우리 사이에 성벽을 구축해 민초를 수용할 수 있도록 한 형태이며, 마지막은 마안봉(馬鞍峯)으로 사모봉과 비슷하지만 두 개의 봉우리 크기가 같아 마치 말 안장과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 중에서도 정약용 선생은 백성들이 스스로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입지를 첫 번째로 언급한 고로봉형이라 했으며, 그 대표적인 산성이 바로 남한산성이라 말했다. 남한산성은 해발 482m 청량산을 두르고 있다. 청량산의 지형은 성 밖으로는 경사가 급해 오르기 힘든데,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머무르던 송파 방향인 서문 밖으로 오르는 길은 특히 험준해 조선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중국으로 갈 때 요동 이전 험준한 산골짜기로 소문난 마천령(摩天嶺)이나 청석령(靑石嶺)과 같다는 말을 할 정도다. 반면에 면적이 2.3㎢ 정도 되는 성 내부는 서쪽보다는 동쪽이 낮아 성내의 물이 모여 동으로 흐르게 되는데 동문 옆 출수구에는 별도의 수구문이 있다. 민족의 자존을 건 나당 전쟁의 전진기지 이러한 입지적 장점은 한강유역의 중요성과 맞물려 고대로부터 각별하게 여겨져 왔다. 주지하다시피 남한산성을 처음 쌓은 시대는 통일신라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해 삼국통일을 이루었지만 당나라는 당초 약속대로 평양 이남의 땅을 신라에게 주지 않고, 고구려와 백제의 수도인 평양과 웅진(현재의 공주)에 당군을 주둔시켰으며, 여기에 신라 본토까지 당나라에 복속시키려 하자 동맹관계를 깨버린 당나라에 대해 민족의 자존을 걸고 전쟁을 시작하게 됐다. 672년에 신라는 나당 전쟁의 접전지인 한강유역을 지키기 위해 지리적으로 강한 장점을 가진 주장성(晝長城, 현 남한산성)을 전진기지로 선택하고, 성내 중심부에는 전시상황을 진두지휘하는 지휘소와 후방에서 올라오는 군수물자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 등의 건물을 세웠으며, 주변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등성 위에 약 9㎞의 성곽을 축성했다. 이러한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통일신라는 675년 매초성(買肖城, 현 양주 부근)에 주둔한 이근행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게 되었는데, 매초성 전투의 승리는 당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게 됐으며, 결국 5년에 걸친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뿐 아니라 한민족의 고대역사에서부터 대륙으로부터 오는 거센 힘을 막아낸 곳이다. 현재 남한산성을 외곽으로 둘러보다 보면 고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경도(京都) 인근 통일신라성이라 알려져 있는 하남 이성산성이나 포천 반월산성, 여주 파사성 등에서 볼 수 있는 옥수수 알 모양의 성돌이 곳곳에 재사용 된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평평하면서 투박한 돌과는 달리, 중앙이 볼록하고 바깥으로 둥그렇게 만든 성돌을 만지고 있노라면 이 돌을 만든 선조의 땀이 묻어나는 듯하다.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문화유산팀장 노현균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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