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시호(諡號)는 죽은 사람의 공덕을 찬양하고 기리기 위해 국왕이 내려주는 칭호를 뜻한다. 한 예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경우, 우리가 잘 아는 충무(忠武)가 그 시호인 것이다.
이러한 시호는 조선 전기 국왕의 친족이나 문관과 무관으로 오늘날 장관급에 해당하는 정2품 이상의 높은 관직을 지낸 관원이 죽은 뒤 받았는데, 조선 후기에는 높은 관직이 아니더라도 유학자나 절의를 지키다 죽은 사람 중 행적이 뚜렷하게 드러난 사람에게도 국왕이 특별히 시호를 내려줬다.
시호는 여러 과정을 거쳐 결정됐다.
먼저 시호 대상자의 행적과 공적을 적은 글인 시장(諡狀)을 작성해 예조에 제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예조에서는 홍문관으로 시장을 보내고, 홍문관에서 시장을 살펴본 후 3개 시호 후보를 정한다.
이후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시호를 동의하는 제도인 서경(署經)을 거쳐 시호를 결정하고, 이후 국왕은 최종적으로 시호문서를 발급해 후손에게 내려준다.
시호문서는 발급된 시기에 따라 변화했다.
조선 전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는 시호교지(諡號敎旨)를 발급했고 대한 제국기에는 시호칙명(諡號勅命)과 시호관고(諡號官誥)를 발급했다.
시호교지는 국왕의 명령으로 발급한 문서이기 때문에 국왕의 명령을 뜻하는 ‘교지(敎旨)’를 기재하고 국왕의 어보인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었다.
특히 시호 대상자의 관직과 성명을 기재하는 방식, 시호를 기재하는 방식, 시주(諡註: 시호에 담긴 뜻)의 기재 여부와 위치 등에 따라 문서 양식도 조금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시호교지에 사용한 종이는 붉은색으로 염색하고 금박을 뿌린 두꺼운 종이를 사용했는데, 시호 대상자의 후손이 시호교지 종이를 직접 마련하기 때문에 조선 후기로 갈수록 화려한 금박 장식의 종이가 사용됐다.
대한제국기에 발급된 시호칙명은 황제의 명령을 의미하는 ‘칙명(勅命)’을 기재하고 시호 대상자에게 추증된 품계·관직, 살아있을 때 최종적인 품계·관직, 성명, 시호를 차례로 기재했다.
발급 시기는 청 연호 대신 대한제국의 광무 또는 융희 연호를 기재하고 새로 만든 어보인 칙명지보(勅命之寶)를 찍었다.
시호칙명의 종이는 이전 시호교지와 마찬가지로 붉은색 종이에 금박으로 장식됐다.
1910년(융희 4) 8월에는 시호 대상자에게 새로운 양식의 시호관고를 내려주었는데, 이때는 ‘칙명’의 용어가사라지고 시호 대상자의 관직·성명·시호를 기재했다.
시호관고의 종이는 금박으로 장식된 붉은색 종이를 사용하지 않고, 당시에 발급된 문무관 관고와 동일한 흰색 종이를 사용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1910년 발급된 시호관고 26점을 보존·관리하고 있다. 시호 대상자의 후손에게 대부분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일병합이 됐기 때문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호를 받은 인물 중 기정진(奇正鎭)과 이인철(李寅轍)의 경우 같은 시기에 동일한 시호로 발급된 시호칙명과 시호관고가 함께 남아 있다.
순종은 기정진과 이인철에게 시호관고를 발급했지만, 그 후손은 붉은 종이를 직접 제출해 시호칙명을 다시 발급받았다.
기존에 발급한 시호관고는 그 후손에게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궁내부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이후 장서각에 소장돼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100여 년 동안 장서각에 소장됐던 기정진과 이인철의 시호관고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의 고문서 조사·수집과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통해 100여 년 후인 최근에 와서 시호칙명과 함께 다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됐다.
시호문서의 제도는 시대가 흐를수록 근대화됐다. 하지만 시호 대상자의 후손은 새로운 양식의 시호관고보다는 ‘칙명’을 기재하고 금박으로 장식된 붉은 종이의 시호칙명을 더 선호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호를 통해 선조를 현양하는 측면에서 보다 전통적인 방식을 선호한다는 것은 기정진과 이인철의 시호칙명과 시호관고를 통해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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