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료 한 잔 마시러 들어간 판교 소재 한 가게 주인이 내게 물어온다. “거기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있는 외국 학생들, 어휴 한국말을 너무 잘해, 거기서 도대체 뭘 배우고 있어요?” 교정을 지나가며 수다 떠는 학생들의 이야기가 귀에 꽂힌다. “카페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내가 보는 책을 흠칫 보시더니 이런 걸 다 읽을 줄 알어? 대견해 하며 엄치척 하셨어”, “약을 사러 갔는데 어서 나으라며 따뜻한 음료 하나를 쥐어 주시더라고”…. 이웃들의 따뜻한 관심과 다독임이 학생들의 힘든 유학생활을 위로하고 응원해 주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는 세계 곳곳에서 한국학을 배우러 온 비교적 다양한 국가의 유학생들이 있다. 성남 특히 판교에 사는 주민이라면 한 번쯤 한국말을 썩 잘하는 이국적 외모의 학생과 마주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간 졸업생들은 이곳에서 만났던 크고 작은 경험과 인연을 고맙게 여기고 있다. 때때로 국제학술회의에서 만나 안부와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어떤 이는 외국 여행길에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인연을 앞세우며 한국말을 하며 반갑게 다가서는 외국인을 마주치기도 했단다.
아마도 그들이 학문적 깨달음과 한국학에 대한 열의를 놓치지 않은 데는 한국인과 주고받은 이런 마음나눔(感通감통)이 적잖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학문의 뜻을 좇아간 낯선 땅, 그곳에서 맺어진 소중한 국제 인연과 반가운 재회의 염원은 지금으로부터 1100여 년 전 사람들에게도 있었다. 8~9세기 동아시아는 상상 이상으로 교류가 활발했다. 당의 장안과 오대산(중국 산시성 소재)에는 여러 지역의 인재들이 학문과 문화를 배우러 모여들었다. 한국학을 배우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온 유학생은 이들에 비할만하다.
장안에서 맺어진 발해와 일본 문사 간의 애틋한 사연 하나를 통해 당시 학자들의 돈독한 우의를 엿보고자 한다. 자료가 적은 고대사의 특성상 다른 시대처럼 깨알같은 이야기가 구성되기는 어렵지만 그 옛날 국제 교류에 얽힌 드문 사례이니만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사연의 주인공은 왕효렴(王孝廉)과 구카이(公海)다. 왕효렴은 발해 문인 관료였는데 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행적을 소개할 수는 없으나 804년 11월경 당 장안에 있었다. 구카이(空海, 774~835)는 일본 진언종(真言宗)을 개창한 승려로, 804년 견당사 일행에 포함돼 당을 향했다.
그 사행은 사이쵸(最澄), 다치바나 하야나리(橘逸勢), 레이센(霊仙) 등 당대 일본의 최고 신진 문사들을 대거 포함하는 등 일본조정으로서는 상당한 공을 들인 행보였다. 『청래(請來)목록』에 의하면 이 사신단은 당으로부터 216부 461권에 달하는 경전, 만다라, 밀교 법구 등을 입수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은 5월에 4척의 선박에 나누어 일본에서 출항했는데 도중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고 당에 무사히 도착한 것은 구카이가 승선했던 제1선과 다른 1척뿐이었다.
장안에 있던 왕효렴 일행은 805년 12월 갖은 고생 끝에 일본 사신단이 그곳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이 머무는 숙소를 내방해 노고를 위로했다. 위로를 받은 일본 사신단은 깊이 감동했다.
당시 문사들은 이러한 마음을 시문으로 표현해 서로 주고받았는데 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일본 측에서는 구카이가 시문을 작성했고 『성령집性靈集』 5에 그 내용이 남아 있고, 비록 기록은 없지만 발해 측에서도 왕효렴이 답문을 지어 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왕효렴은 뛰어난 문장가로 후에 그가 일본을 방문해 일본 문인과 주고받은 시 11수가 일본의 『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에 남아 있다. 이렇게 두 학자는 이국땅 장안에서 시문을 나누며 감통의 인연을 맺었다.
세월이 한참 지난 814년, 왕효렴은 대사로서 일본을 향했는데 도착하자마자 구카이를 만나기 위해 수소문에 나섰다. 구카이가 고야산(高野山)에서 수도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왕효렴은 그에게 시와 서신을 보냈다. 뒤늦게야 왕효렴이 왔다는 사실을 안 구카이가 급히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한다.
“황공하옵게도 (이제야) 편지와 시를 전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사께서 하시는 일마다 만복이 깃들며 나날이 벼슬이 높이 오르고 계신 것을 크게 축하드립니다. 소식과 인연을 구하고자 했건만 늦게 와 바로 만날 수 없었으니 어떤 말로 원망을 표할 수 있으리까? 천만다행으로 사람을 통해 이 글을 올리니…” (『고야잡필집高野雜筆集』 상에 수록)
하지만 이에 대한 왕효렴의 답글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글 역시 왕효렴에게 전달되지 못했던 것 같다. 시간적으로 따져 보더라도 글을 전한 이가 815년 정월 19일에 헤이안에 도착했고 왕효렴은 22일에 귀국길에 올랐으니 편지가 도착했을 무렵 이미 그곳을 떠났던 모양이다. 이들의 재회는 이렇게 불발되고 말았다.
애틋한 사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왕효렴의 귀국길은 순탄치 않았고 일본 인근 앞 바다에서 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5월 18일에 일본 에치젠(越前) 지방으로 되돌아왔다. 파손된 선박을 수리하고 귀국의 날을 기다렸으나 때마침 에치젠을 휩쓸었던 천연두에 감염돼 6월 14일 그는 그곳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한편 그가 에치젠에 돌아와 있다는 소식을 들은 구카이는 다시 재회를 모색하던 중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망연자실했다. 당시 그의 허망함과 애끓는 추도의 마음을 시문에 담았는데 현재 그 1연만 전한다. 비록 재회는 못했지만 구카이는 왕효렴과 맺은 인연을 고향 같은 오랜 옛정으로 여기고 있다,
“발해 왕대사 효렴이 병들어 사망하였다. 이런 소식을 듣는 일은 견디기 힘든데 하물며 고향 같은 오랜 옛정의 일이니 어이할까..” (『습유잡집拾遺雜集』에 수록)
구카이는 장안에서 왕효렴과 만난 일을 고행 같은 옛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의 감통은 여기서 끝나버린 것일까? 비록 서로 마주하는 재회를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애틋한 사연이 시문을 통해 회자되고 있으니 그들의 감통은 오랜 시간을 너머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외국 친구와도 큰 불편 없이 소소한 안부로부터 심도 있는 학술적 견해나 학술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 만약 왕효렴과 구카이가 요즘 살았다면 얼마나 많은 시문을 주고 받았을까? 아니 어쩌면 이렇듯 애절한 사연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국제적 만남이 녹녹하지 않았던 시대, 문사들이 남긴 애틋한 감통의 사연은 잦은 교류와 만남에 노출된 우리에게 마음을 나누는 만남의 소중함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렇기에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생들이 이곳에서 마주한 주민들의 다독임은 감사한 감통의 순간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먼 훗날 이곳 성남을 자신의 옛 고향으로 떠올리고 이곳에서 마주친 성남시민과의 따뜻한 인연은 한국학 연구의 귀한 동력을 제공해 줄 것이다. 오가는 길에 학생들에게 따뜻한 눈길과 격려의 말씀을 건네 준 주민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특별기고 구난희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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