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들이 본격적으로 남사할린 개척 이주를 떠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였다. 일제는 1938년부터 주로 경상도 출신 조선인 인력을 강제적으로 남사할린에 투입해 석탄 채굴, 벌목, 비행장 건설 등의 노역을 시킨다.
1945년 일제 패망 후에도 사할린에 남겨져 있던 한인 다수는 한반도로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패망 즉시 조선인의 지위를 외국인으로 편입시켜 사할린에서 귀환시켜야 할 대상에서 지워버렸고, 사할린 상주 노동력 손실을 원치 않았던 소련 정부도 이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한반도에는 아직 사할린에 남겨진 조선인의 귀환을 요청할 수 있는 정부 기구나 기관이 부재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일제가 떠나자마자 일본 학교 건물을 접수해 조선어 교육을 시작했다. 조선으로 돌아갈 준비를 스스로 시작한 셈이었다. 하지만 냉전이 심화되면서 이들이 조국으로 돌아갈 기회는 요원해져갔다. 그럴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졌다.
1950년대 소련 정부는 변방 지역에서 민심 이반이나 이탈을 막기 위해 방송을 통한 사상교육을 강화하면서 라디오 보급 사업을 진행했다. 소련 입장에서 가장 변방에 속하는 사할린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할린 한인들은 가까운 일본의 라디오 방송을 자연스레 듣게 되었다.
사할린 한인들은 야간에 한국 AM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종의 전파월경(spillover)가 일어난 셈인데, 야간에 전리(sporadic) D층이 얇아지면 나타나는 전리 E층이 300~3,000kHz 사이의 전파를 난반사 시키면서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덕분에 AM 라디오는 야간에 최대 2,000~2,500km 거리까지 확산될 수 있다. 한반도와 1,700km 거리에 있는 사할린은 야간에 AM 라디오가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물론 난반사로 전달되는 전파는 신호도 선명하지 않고, 전파간섭도 많이 받게 마련이다.
사할린 한인 사이에서 야간에 한국 라디오를 듣는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정상적이지 않은 경로로 수신되는 전파의 특성상 소리는 깨끗하지 않았고, 지직대거나 끊기는 일도 잦았다.
사할린 한인들은 몰래, 조금씩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고향의 노래, <마포종점>, <새타령>, <갈대의 순정>, <눈물이 진주라면> 가사를 노트에 적어 가며 배우기 시작했다. 한 곡을 통째로 여유 있게, 또 반복적으로 들을 수 없던 사람들은 들리는 만큼, 기억할 수 있는 만큼 가사를 적어 다른 한인이 들은 노랫말과 비교하며 노래를 완성하고 불러나갔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남아있으리라 여겨지는 가족들과 같은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다.
88서울올림픽 장면이 TV를 통해 소련에도 중계되었고, 이를 통해 사할린 한인들은 고향, 한국을 간접적이나마 구체적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마침내 1990년 7월 하춘화, 주현미 등을 포함한 한국 연예인으로 구성된 사할린 위문공연단이 사할린을 방문해 공연을 펼쳤다. 이 공연은 한국에도 방송으로 중계되었다.
사할린 한인들에겐 강제로 잔류된 지 45년 만에 고향 사람이 찾아와 자신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온 노래를 불러주는 마법과 같은 순간이었다. 트로트 가수 중심으로 이뤄진 공연단 역시 행사가 열린 축구장을 가득 채운 채 자신들의 노래를 모두 따라 부르는 10만에 가까운 관객 앞에서 함께 울었다.
1990년대 말부터 해방 전에 건너간 사할린 한인 1세를 대상으로 한 영주귀국 정착 사업이 시작되었다. 안산, 인천 등지에 이들을 위한 영구귀국 마을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1세대의 귀국만을 허용하면서 가족과 다시 헤어지는 두 번째 이산의 아픔이 나타나기도 했다.
2020년 5월 영주귀국 대상이 사할린 동포의 자녀와 그 배우자로까지 확대되는 법이 통과되었다. 라디오로 그리던 고향, 노래로 꿈꾸던 고향에 사할린에서 생겨난 가족과 함께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특별기고 조일동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인류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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