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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과 삶이 배여 있는 양복점

  • 관리자 | 기사입력 2008/07/24 [15:47]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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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에서만 32년 전통의 ‘장미라사’

구두도 맞춰야 신을 수 있고 옷도 맞춰야 입을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기성복이란 거대한 변화 때문에 양복점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밀 듯한 큰 변화 속에서도 30년이 넘는 세월을 꿋꿋이 지켜온 양복점이 있어 기자가 방문했다.

중원구 중동사거리 버스 정거장에 위치한 장미라사(대표 김두산․ 62․ 중원구 중동 2428). 간판만 봐도 살아온 세월이 묻어있어 정겹다. 김 사장이 양복 일을 하게 된 것은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도청에서 사환으로 일을 했을 때부터라고 한다. 

그 당시 어린나이였지만 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던 김 사장은 학교와 사환 일을 병행하면서 성실하게 살았다. 이런 김 사장을 안쓰럽게 생각했던 도지사가 어느 날 김 사장을 불러 놓고 “이렇게 고생하지 말고 차라리 기술을 배워라”고 권유해 양복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그 당시 양복점의 인기는 대단했지요. 번화한 시내의 번듯한 가게는 대부분 양복점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김 사장은 잠시 옛날을 회상하는 듯했다. 고향이 전북 김제였던 김 사장은 전주에서 양복 일을 하다가 좀더 큰 뜻을 품고 1972년 서울로 상경, 양복점을 직접 운영했지만 구로공단이 생길 무렵 1차 오일쇼크로 사업을 정리하고 시골로 하향한 뒤 다시 77년에 성남으로 오게 됐다고 한다. 

“그동안 양복의 유행이 얼마나 변했을까요?” “양복은 생각보다 유행을 별로 타지 않았어요. 다만 깃 모양이나 몸에 꼭 들어맞게 입는다든가, 복고풍으로 헐렁하게 입는다든가, 단추개수나 양복 뒤를 하나 아니면 둘로 가르던가 하는 정도였지요.” 

잘 나가던 양복점은 80년대부터 기성복에 밀려 점차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는데 근래에 와서 맞춰 입는 사람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중동에서만 3번째 옮겼고 지금의 자리에선 7년 정도 되었다는 김 사장의 양복점 한 부분엔 대형 드라이 기계며 세탁기가 자리 잡고 있다. 양복을 맞춰 입는 손님에게 5회 정도 드라이를 무료로 제공하기 위한 용도인데 자기만의 노하우로 양복이 쉽게 변형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김 사장은 대한민국 10번째 안에 들어가는 사람만 할 수 있는 91년 제24차 세계주문복업자연맹총회 패션쇼에 출품하는 영광을 가졌고, 93년엔 SBS 방송의 제1회 세계국제패션쇼에도 출품했을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이다. 슬하에 2남1녀를 둔 김 사장은 어려웠던 시절 묵묵히 함께해온 아내에게 가장 감사하고 잘 자라준 자녀들에게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바느질을 할 것이라는 김 사장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장미라사 734-1793
이길순 기자 eks3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