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건 사진뿐이라는데 변변한 사진 한 장 남길 수 없었던 그때 그 시절, 한 장의 사진은 아린 상처 한편으로 아련한 그리움이며 포근한 행복이다.
찬이라곤 김치 한 사발이 전부였던 자취방의 추억, 오리엔트 공장에 함께 다니던 친구 명순아, 보고싶다! 같은 반 친구 병진아, 미안해! 그때 내가 네 도시락 다 뺏어 먹어서. 어디 있니, 친구들아! 불도저는 도는데~ 70년대 성남은 서울 성수동 뚝방촌에서 쫓겨 온 허씨(남·58·태평동)의 가족에게 춥고 배고픈 곳이었다. 한 끼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처지, 학교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기에 그는 학교 밖 아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6개월을 빈둥거리던 그가 찾아간 곳은 광주대단지사업소 뒤편 중부재건학교(현 태평1동 통계청 뒤편). “천막학교였어요. 그곳에 나 같은 아이가 많았고, 대부분 화재민이나 철거민 아이들이었지요. 흙투성이 언덕배기를 등산하듯이 다녔지만 수업료도 못내는 우리를 정으로 대해 주시는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마냥 좋았습니다.” ‘아이들은 무방비로 방치된 상태였다’고 회상하는 당시 재건학교 선생님(남·74·성남동)은 “대강 산만 밀고 쏟아놓을 때니 서부 개척시대나 다를 바 없었고 밤에 불도저가 돌면 반딧불이 날아다니듯했다. 한 쪽 밀고 천막 치고 이동하면 복덕방도 리어카에 짐 싣고 따라가던 시절이었다. 먹을거리 살 가게도 직장도 없었으니 부모들이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따라 서울로 먹고 살기 위해 일하러 갔다. 무작정 이주부터 했으니 밤낮으로 불도저는 도는데 정작 아이들은 갈 곳이 없었다”고 한다. 형설지공[螢雪之功] 이런 학교조차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공단에서 일하며 제때 배우지 못한 한을 야학에서 풀었다(은행동, 수진동 등). “상원초등학교 근처 언덕배기에 야학이 있었다. 공단지역을 돌며 방을 붙여서 학생을 모아 영어와 한문을 가르쳤다”는 선생님(남·54·이매동)은 “상대원공단에서 일하는 이삼십 대들이 졸면서 공부해서 검정고시 합격할 때 기뻤다. 과외비 대신 얻어 쓴 방이 야학 교실이었다”고 한다. 추운 방 아랫목에서 친구와 함께 형설지공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들도 밤에 등불을 켰다.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지금의 신흥동 부근 조그만 원주민 마을에서 처음 야학을 했다는 김 선생님 (여·65·성남동)은 “가르쳐 주었다는 의미를 넘어 방황하는 아이들을 엇나가지 않게 붙들고 친구처럼 놀아 주었던 그 몇 년이 내 생애 커다란 보람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주전자에 끓인 라면을 나눠주며 형, 누나, 엄마처럼 내 인생에 정다운 친구가 되어 준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 당신들이 있어 그때는 참 따뜻했습니다. 보고 싶다! 친구야~ <비전성남 명예기자> 박경희 기자 pkh2234@hanmail.net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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