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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그는 왜 400년 대종택을 팔았을까?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7/02/23 [14:13]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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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청각매매증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 비전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민간으로부터 고서와 고문서 등의 문화재들을 기증·기탁 받아 관리, 연구하고 있다. 개인들이 소장한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안전하게 보존·관리하고 연구하기 위한 것이다. 가문의 가보로, 국가의 보물로,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는 이루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중에서 필자가 특히 각별하게 생각하는 자료가 있는데, 2004년 안동 고성이씨 임청각에서 기탁한 4,966점 중 하나인 가옥매매문서가 그것이다. 이 문서는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았고, 얼핏 보기엔 그리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그렇지 않다.
이 문서에 적힌 가옥인 ‘임청각(臨淸閣)’은 보물 제182호로, 1510년경 건립된 이래 오늘날까지 500년 동안 안동 고성이씨가의 대종택으로 자리를 지켜온 건물이다. 이 문서에서 임청각의 매도인으로 등장하는 ‘중화민국 회인현의 이상희’는 고성이씨 임청각파의 17대 종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초명이다. 임청각에서 태어나 임청각의 주인인 그가 1913년 6월, 400년을 지켜온 대종택을 팔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석주 이상룡 선생. 1925년 상해임시정부 국무령 재직 시     © 비전성남
석주 이상룡 선생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 대한 충격으로 척사위정(斥邪衛正)을 시작했고,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계기로 본격적인 의병항쟁에 돌입했다. 임청각이 소유한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그들을 해방한 일은 안동의 유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다.
1910년, 조선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고 몇 달이 지난 1911년 정월, 석주 이상룡은 식솔과 자신을 따르는 50여 가구를 거느리고 서간도로 망명을 떠났다. 서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건설해 경학사라는 항일 자치 결사를 조직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경학사는 부민단을 거쳐 한족회로 발전했고, 신흥강습소 역시 신흥무관학교를 거쳐 1920년 서로군정서 창립의 모태가 됐다.
그러나 1912~1913년에 걸친 흉작은 이와 같은 서간도에서의 초기 활동에 운영난을 초래했다. 1913년 6월, 석주의 아들 준형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종택인 임청각을 팔기 위해서였다.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옥과 토지를 팔고 ‘임청각 매매증서’를 남겼다.
석주 선생은 이후로도 서로군정서 독판,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을 역임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매진했으나 우리땅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32년 만주 땅에서 생을 다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불의에 영합하고, 개인과 가문의 보존을 위해 권력에 복무하는 것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세상 속에서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것이 바로 석주 선생과 같은 분들의 삶에 담긴 가르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