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2일 저녁 7시 30분 성남시청 1층 온누리홀에서 정재찬 교수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 강연이 있었다.
열여덟 번째 오늘의 강연을 마지막으로 올 한 해 힘차게 달려온 성남행복아카데미 강연도 아쉬운 막을 내린다. 내년 더 멋진 만남을 기약하면서.
밝은 미소로 입장하는 강미애(판교동) 씨를 만났다. 성남행복아카데미를 늘 찾는 분이다. “유명한 분들을 쉽게 만날 수 없는데 행복아카데미에 오면 다 만날 수 있고 사진, 음악, 문학 등 콘텐츠가 너무 다양하다. 성남시에서 이런 강연을 꾸준히 들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줘 감사하다”고 전했다.
정재찬 교수는 현재 한양대 입학처장,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고 저서로는 이미 너무도 유명한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비롯해 『그대를 듣는다』, 『현대시의 이념과 논리』 등이 있다. 강연은 53세 늦은 나이에 신진작가상을 안겨준 책 『시를 잊은 그대에게』가 산고를 거쳐 출산하게 된 배경 이야기로 시작됐다. 40대 중반에 썼는데 두 쪽짜리 서문을 안 써 6년을 묵힌 책이다. 문학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방향·속도가 옳은지, 멈추는 것을 결정하고, 성찰하고 반성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이런 문학 강의를 공대생들에게 하자 매시간 박수를 치고 마지막 강의에는 기립박수를 쳤다. 거기서 힘을 얻어 책을 펴게 됐다.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고 실패했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나아지려고 꿈을 꾸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의사, 변호사 같은 명사로만 생각하고 있다. 형용사로 생각해보자. 나는 존경받는 00가 되고 싶어. 국회의원이 돼도 존경받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이고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면 만족하게 된다.
이어 2017년 펴낸 책 『그대를 듣는다』 내용을 중심으로 강연이 진행됐다. 송창식의 ‘나의 기타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연상하게 한다. 송창식은 ‘나의 기타이야기’에서 아름답고 철모르던 시절의 사랑과 욕망, 비애와 절망의 이야기와 그토록 간절히 담고자 했던 목소리를 딩동댕 딩동댕 가슴 시린 운율로 전하고 있다.
키프로스 섬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이상적 여인을 사랑했으나 현실에 없으니 자신이 공을 들여 여인상을 만든다. 완벽한 그녀에게도 뭔가 부족했고 절망했다. 다행히 그의 기도를 들은 아프로디테가 조각상에 온기를 불어넣자. 그녀는 갈라테이아라는 실재의 여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 온기가 바로 목소리다.
이어서 강연은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영화 오드리 헵번 주연 My Fair Lady로 이어진다. 런던 거리에서 꽃을 파는 남루한 집시풍의 엘리자는 언어학자 히긴스의 노력으로 6개월 만에 우아하고 세련된 귀족 부인으로 변신한다. 상류층 부인의 삶을 누리게 됐지만 교양은 어떤 면에서 개성과 본능의 억압일 수도 있는 것. 원래 목소리란 지문과도 같은 자신만의 개성과 정체성의 표상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엘리자는 정작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
My Fair Lady의 또 다른 원조인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도 마찬가지다. 인어공주는 다리를 얻는 대신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마침내 왕자를 사랑해 물거품으로 변한다. 상류 사회로 진입하는 자격과 무관한 목소리 따위야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것이 결정적일 줄 어찌 알았겠는가. 그래서 정 교수는 인어공주를 신분상승에 실패한, 유린당한 엘리자라고 표현했다.
시를 읽는 마음으로 타인의 목소리를 읽고, 시인의 마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읽는 것, 그리하여 오동나무 소녀에게 목소리를 담아 주고, 엘리자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며, 인어공주의 목소리를 회복해 주었으면 싶다. 목소리를 회복해 주는 것, 그것이 이 불통의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이자 방식이었으면 싶다. 목소리가 살아야 사람이 산다. 목소리는 곧 그 사람이니까.
그는 오늘날 이 불통의 시대에 회복을 말하고 있다. 사람이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오히려 소통이 안 되는 현실을 Echo chamber에 갇혀 남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했다. 자기 목소리부터 경청하라. 알게 된다,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역겨운지를. 시를 왜 읽어야 하나? 우리는 귀에 들리는 것만 듣지 말고 시인의 목소리를 읽고 침묵마저 읽어야 한다. 오후 9시, 강연이 계속되는 동안 정 교수는 송창식의 ‘나의 기타이야기’를 무반주로 송창식 뺨치게 부르고, 웃음의 도가니로, 때론 삶의 숙연함으로, 언어의 마술사가 돼 청중들을 휘어잡았다. 1인 콘서트가 맞다.
강연이 끝나자 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추운 겨울밤, 살아있는 목소리를 듣게 해준 정 교수에 대한 헌사였다. 정교수와 사진을 찍기 위해 청중들은 길게 줄을 섰고 책에 사인을 받는 사람, 포스터에 사인을 받는 사람, ‘힘내세요’라는 글귀를 적어 달라는 사람으로 로비는 붐볐다. 정 교수는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 보듬어 주고는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박혜정(하남 미사) 씨는 “TV를 통해 정재찬 교수님을 뵙고 강의가 듣고 싶어 왔다. 성남행복아카데미가 너무 좋아서 하남에서 찾아오는데 올해 마지막이라서 아쉽다”고 했다. 성남행복아카데미가 성남을 넘어 용인, 하남, 남양주 등으로 멀리 퍼져 나가고 있다.
“의술, 법률, 사업, 기술이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교수처럼 그도 삭막한 이 사회에 그만의 독특한 목소리로 시의 아름다움을 들려주는 선구자적 사명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취재 구현주 기자 sunlin1225@naver.com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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