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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조선시대 과거 답안 작성의 길라잡이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9/12/23 [14:50]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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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비는 과거 급제를 통해 벼슬길로 진출해야만 비로소 입신양명(立身揚名) 할 수 있었다. 오늘날처럼 벤처 정신으로 창업을 하거나 기업체에 취직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부양과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관직에 나아가는 길밖에 없었다.

유교(儒敎)의 나라 조선에서 관료가 되기 위한 검증 방법으로는 1차적으로 유교 경전의 이해와 그 다음 역사 지식과 시(詩)와 문장 능력 그리고 시대의 난제(難題)에 대한 해결책 등을 주요 평가 요소로 삼았다.
 
4서5경(四書五經)으로 대표되는 유교 경전(經典)은 말 그대로 성인(聖人)의 바이블로서 누구나가 천자문을 떼고 나서부터 숨을 그칠 때까지 일자일구(一字一句)를 외우고 새겼던 글이었기에 서로 간의 변별력이라는 측면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 답안 중에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현실 문제의 해결 방법을 요구받았던 ‘대책(對策)’과목이다. ‘대책’이란 시험 문제로 주어지는 책문(策問)에 대한 과거 응시자의 대답(답안)인데, 출제 문제가 패러독스적이거나 현실적 당면 문제의 해결을 묻는 것이 많았고, 그 답안도 다른 과목에 비해 응시자의 식견과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었다.

‘대책’은 교과서가 따로 없었기에 이전에 지가(地價)를 올리던 이름난 대책문이나 주제별 모범 답안을 가지고 공부했는데, 대체로 과거 공부를 하던 집안에는 일종의 수험서로서 서로 베껴가며 은밀히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과문규식(科文規式)》과 같은 종류의 책은 꽤 알려져 있으나, 이번에 이지면을 빌어 거의 공개된 적이 없었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돼 있는 2종의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2책짜리 《집사책(執事策)》이고, 다른 하나는 3책짜리 《책형(策型)》으로 모두 손으로 직접 베껴 쓴 필사본이다.

《집사책》은 국왕이 직접 책문(策問)을 출제한 경우‘전책(殿策)’이라 함에 비해 고시(考試) 담당관인 집사(執事)가 출제한 문제와 그 답안을 모아 엮었기 때문에 《집사책》이라고 명명한 것인데, 사실 이 책에는 수록된 총 47편 가운데 16편은 전책(殿策)이다.

이 책의 특징은 목차만 보고서도 대책(對策)의 핵심이 바로 파악되도록 한 것이다.
 
예컨대 ‘인혁(因革)’(유지해 나아갈 것과 혁파할 것)이란 주제 아래에 ‘구명단종인정(救明斷終仁政)’(분명하게 판단하여 폐단을 구하고, 인정을 펴는 것으로 결론지으라.)과 같이 간결하게 요점을 제시해 놓았으며, 또 본문위쪽에는 주제어와 책문의 서술 방식을 나타내는‘허(虛)’, ‘중(中)’, ‘축(逐)’, ‘당금(當今)’, ‘설(設)’, ‘구조(救措)’, ‘종(終)’ 등의 핵심포인트를 표시해 줘 수험생의 좋은 길라잡이가 되도록 꾸며 놓았다.

《책형》은 대책문을 짓는 모범·모델이라는 뜻으로,‘문난극당치(問亂極當治)’(혼란이 극도에 달하면 다스릴 것에 대해 묻다) 등 85개 주제가 실려 있다.
 
이 책의 특징은 글을 짓는 기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첫머리를 쓰는 방법에 대해 “두서너구절로 시작하되 반드시 절실하기에 힘써 한 편의대지(大旨)를 함축해야 하며, 말이 많아서는 안 된다.……하지만 비록 많이 쓰더라도 교묘하게 전환시킨다면 시관(試官)이 그 지루함을 망각하게 된다”라 하고, 중간 부분에서는 “이렇게 하면 좋고, 저렇게 한다면 좋지 않게 됨을 논하라. 축조(逐條)하는 내용에 은밀히 호응시키되 결말을 드러내는 일은 절대로 금하라.” “매 조목 아래에는 선유(先儒)의 설로 결말짓거나 폐단을 구제할 뜻으로 결말지으라.” 등등의 구체적 작문 기법을 설명하고 있다.

손때가 많이 묻은 두 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족집게 개인 과외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오늘날도 저마다의 수재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혹독한 입시(入試)와 입사(入社)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밤낮없이 수험서, 참고서, 문제풀이집을 붙들고 있다.
 
과거 급제만이 거의 유일한 출세길이었던 조선시대에, 자신의 운명을 가를 수도 있고 나아가 집안의 명운까지 좌우할 수 있는 선비의 떨리는 붓끝을 상상하자면, 그저 숙연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