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중국에서 시작된 전염병인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적인 재난상황이 초래되고 있다. 항생물질의 개발이나 예방 백신의 개발 등 의학의 발달이 영양과 위생 개선과 함께 급속도로 이뤄지면서 한때는 우리 인류가 전염병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종 전염병은 꾸준히 발생해왔고, 그중 몇몇은 심각한 위협을 초래했다.
『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전염병을 의미하는 한자 ‘역(疫)’을 ‘백성들이 모두 앓는 것[民皆疾也]’이라고 풀이한다. 『석명(釋名)』에서는 ‘역(疫)은 역(役)이다.’라고 해 요역(徭役)과 같은 집단적 부역과 연관짓기도 한다. 대규모 요역의 경우 전국의 다양한 곳에서 사람들이 모였고, 부실한 영양과 위생상태 속에서 집단적으로 생활하게 됨으로써 전염병의 발발과 전파가 급속도로 이뤄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또한 이들이 다시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됨에 따라 그 전파가 지역을 넘어가며 확장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코로나19의 범지구적 전파와 대규모 인명 피해를 초래한 배경이 된 것은 인구의 증가와 도시화, 그리고 교통의 발달과 세계화일 것이다. 현대화된 사회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치료약과 백신이 없는, 전염성이 강한 전염병의 확산을 억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대두된 일상의 변화가 이른바 ‘사회적 거리두기’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새로운 것은 아니며, 전염병을 대처하는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전염병이 발생하면 일상의 많은 활동을 자제하며 사람들간의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조극선(趙克善1595~1658)의 일기인 『인재일록(忍齋日錄)』에도 이와 관련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1621년(광해군13)에서 이듬해 초까지의 기간에 극선일가가 거주하는 덕산현(현 충청남도 예산) 일대에는 홍역 등 전염병이 잇달아 창궐했다. 늙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있던 조극선 일가는 전염병을 피해 다른곳으로 옮겨 10개월이나 거주했다. 그리고 많은 활동을 줄여나갔는데, 여기에는 심지어 제사와 아버지의 생신과 같은 중차대한 일도 포함됐다. 이 시간을 지나면서 조극선 일가는 노비를 포함해 7명의 식솔을 잃었고, 말도 3마리나 죽어나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1년이 넘도록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엄혹한 전염병의 시절을 견뎌 나갔다. 이러한 모습은 전염병을 대처하는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이문건(李文楗 1494~1567) 역시 1556년(명종11) 봄에서 여름 사이에 홍역이 퍼지자, 할아버지가 쓴 손자 육아일기 『 양아록(養兒錄)』에 ‘크게는 제사를 멈추고 작은 일로는 길쌈을 그만두었다’고 기록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가운데 홍역은 2~3개월 만에 사그라졌고, 다행히도 이문건 일가는 병마를 이겨 낼 수 있었다. 어린 종으로부터 시작해 2대 독자인 친손자를 비롯한 일가 8명이 홍역에 걸렸지만다행히도 모두 건강해졌던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코로나19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 이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으며,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여전히 암흑속을 헤매고 있다. 어려운 시기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여전히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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