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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역사이야기/ 태평동

  • 관리자 | 기사입력 2010/03/25 [15:58]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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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 없이 태평스럽게 사는 동네 태평동은..

‘근심 없이 태평스럽게 잘 사는 지역’이라는 태평동(太平洞)은 조선시대엔 광주군 세촌면 탄리와 독정리였으나 1914년 탄리로 통합, 1973년 태평동이라 했다. 1975년 10월, 태평동을 1동과 2동으로 나눴고 1980년 태평1동을 1동과 3동으로 나눴으며 1989년 수정구에 편입, 1990년 1월에 태평2동을 2동과4동으로 나눴다.

언제부턴가 확실하지 않지만 세금으로 받은 숯을 보관하는 숯 창고가 있어서 숯골(탄리)로 불렸다는 태평동엔 아프고 흥미로운 역사이야기가 많다.

조선 제18대 임금 현종에겐 아름다운 세 명의 공주가 있었다. 둘째인 명혜 공주가 천연두를 앓다가 겨우 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현종14년 4월 27일). 슬픔이 채 가시기 전, 첫째 명선 공주도 그해 8월 2일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13세였던 공주는 배필이 정해진 상태였다. 슬픔에 젖은 현종과 명성왕후는 두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광명전(경기도유형문화재 제101호·사진)을 중창(重創)하고 절 이름을 봉국사라 명했는데, 바로 태평2동에 위치한 만해 한용운 스님의 상좌인 춘성 스님이 말년에 계셨던 천년고찰이다.

태평동의 수많은 길 중 조선시대 두 대군의 이름을 딴 길이있다. 평원 길과 제안 길이다. 평원대군(1427-1445)은 제4대 임금 세종과 소헌왕후의 일곱째 아들로 19세 때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제안대군(1466-1525)은 제8대 임금 예종의 둘째아들이다. 형인 인성대군이 죽었기 때문에 예종이 죽자 왕이 될 자격을 갖췄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할머니 정희왕후가 반대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 후 정치에 간섭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정희왕후는 제안대군을 평원대군의 봉사손(조상의 제사를 맡아 받드는 자손)으로 입양시켰다. 악기 연주를 잘 하고 노래를 즐겼던 제안대군은 어머니 안순왕후의 죽음 후 여색을 멀리했고 비교적 편안한 삶을 살다 예순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두 대군의 묘는 정확한 위치 추적은 어려우나 태평3동 일대에 있었고 현재 태평3동 일대는 평원 길과 제안 길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구 시청 부근에 630여기의 묘소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정묘호란(1627·인조5) 때 공을 세운 남이흥(1576-1627) 장군의 묘도 있었다. 장군의 묘는 1971년 국가적 사업으로 인해 충청남도 당진군 충장사 옆으로 이장되었는데, 이장 도중 발견된 유물의 보존상태가 좋아서‘충청남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됐다. 그뿐이랴. 태평동엔 그 밖의 수많은 역사문화가 숨쉬고 있다.

성남시 탄천은 태평동을 지나 한강으로 흐른다. 물은 삶의 원천이고 터전이다. 예부터 물을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이룬 곳은 번성했다. 태평동이 근심 없이 태평스럽게 잘 사는 것은 사람들의 염원과 조상의 숨결과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까닭은 아닐는지.

조민자 기자 dudlfdk@hanmail.net
참고자료_ 성남문화원 마을지
도움말_ 윤종준 상임연구위원 |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