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반대한 유신들이 있었으니 ‘두문동 72현’이다. 그 중 직제학 김약시(1335-1406)는 신라 왕자의 후손으로 고려가 멸망(1392)하자 망국의 한을 안고 부인과 함께 걸어서 남한산성 남쪽 금광리(金光里) 음촌에 토굴을 지어 은거했다. 마을사람들이 남루한 그의 의관을 이상하게 여겨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고 음식을 대접해도 받지 않았으며 자 손들에게‘내가 살던 이 고을을 세상에 전하지 말라’고 해서 그가 사는 곳을 부전어동(不傳語洞)이라고도 했다. 그곳은 지금의 금광동 단대오거리 부근이다. 현재 단대쇼핑 부근은 금광동의 입구로 양쪽 산이 마주 접근하는 병목지형으로 광통머리라고도 했다. 금광동은 조선시대엔 광주군 세촌면 단대동이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은행정이·논골·금광리를 병합해서 단대리로 중부면에 편입, 1973년 7월 창곡을 병합해 단대동이 됐다. 그 후 단대동은 1976년 10월 단대1·2동으로, 단대2동은 1980년 9월 단대2·3동으로 분동됐으며,1989년 5월 단대2동은 금광1동으로, 단대3동은 금광2동으로 명칭이 변경돼 중원구에 편입됐다. 금광동은 광산김씨(光山金氏)인 김약시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마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태조 이성계가 그의 곧은 절개를 훌륭하게 생각해 벼슬을내렸으나 ‘눈을 앓아 앞을 보지 못한다’며 거절했고 그의 뜻을 꺾지 못할 것을 안 태조는 성명방(誠明坊·서울 필동)의 집 한 채를 하사했다. 일찍이 그는 집안사람들에게 “내가 좋지 못한 시기에 태어나 종묘사직의 망함을 직접 보고도 죽지못하고 속세를 벗어나 멀리 숨지도 못한 것은 선인의 무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며, 내가 죽거든 여기에 장사하되 봉분도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고 다만, 둥근 돌 두 개를 좌우에 놓아두어 망국의 천부임을 표시하는 것으로 족하다” 했다. 그의 묘소(사진)는 금광동(현재 신구대학 본관)에 있었으나 1969년 성남시 도시개발로 경기도 광주시 실촌면 삼합리로 이장됐고 광주시‘향토문화유산, 유형문화유산 제3호’로지정됐다. 그의 후손들은 높은 벼슬을 지냈다. 특히 김지남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고 저서로 <용계집>을 남겼다. 또한 후손들은 담배농사를 지었는데 품질이 가장 뛰어나 면내에서 생산되는 담배를 모두 일컬어 <금광초>라고 했다.성남시 금광동에 터를 잡은 김약시의 호는 음촌이며 시호는 충정이다. 조민자 기자 dudlfdk@hanmail.net 자료제공 | 성남문화원 도움말 | 윤종준 상임연구위원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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