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남서고 제1회 졸업식날 중앙극장에서 졸업식을 마친 후 기념촬영 © 비전성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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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마당에서 혼례를 치르던 모습이기억에 있다. 사진 맨 오른쪽 중학생 박봉원 © 비전성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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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은 ‘광주군 돌마면 하대원리’라는 주소를 갖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농촌 마을에서 인심 좋은 박씨 일가들이 모여 살던 하대원에서 나고 자란 박봉원(66) 씨.
할아버지는 정미소를, 아버지는 과수원을 운영했으니 시골 마을이었지만 제법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가 성장하며 지켜본 성남은 어땠을까. ‘광주군’이란 지명에서 태어나 ‘서울특별시 광주대 단지’와 ‘경기도 성남출장소’를 거치고 ‘성남시’ 승격에 이르는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박봉원 씨가 국민(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지역엔 ‘성남국민학교’와 ‘돌마국민학교’ 딱 두 곳밖에 없었다. 여덟 살때 돌마국민학교까지 1시간 반 동안 걸어서 등교했던 기억이 새롭다. 풍생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원 도심에는 없던 고등학교가 생겼다. 성남서고등학교다.
광주대단지 조성 후 철거민들의 유입이 시작되는 시기로 인구수 대비 학교가 부족한 상황으로 기억된다. 중학교를 졸업한 아이들 대부분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 한 채 농사일을 돕거나 막노동 또는 제1공단,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산의 나무가 베어지고 불도저가 지나가는가 싶더니 세상이 혼란스러워졌어요. 군용천막이 쳐지고 피난을 떠나온 것처럼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죠. 어린 나이에 그런 모습을 보며, 아프리카 난민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용했던 농촌 마을이었던 하대원에 소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정미소에 곡식을 동냥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그냥 보낼 수 없어 할아버지께선 쌀 한 됫박이라도 들려 보내셨다.
아침에 확인된 농촌의 풍경에는 밤새 배고픈 이들이 다녀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깻잎, 호박, 참외 등 농작물에 손을 대는 일이 연속으로 발생했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과수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리 개의치 않았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그냥 조금씩 나눠 먹는다 생각합시다”라며 그들의 형편을 헤아렸다고 한다.
“두 줌쯤 되는, 200원짜리 국수를 사서 세 식구가 일주일을 살고, 밀가루죽을 끓여서 온 식구가 연명한다고 했어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었다는 소리도 들려 왔어요. 일하러 가야 하는데 차비가 없는 사람들은 버스 창문으로 올라타서 위험하게 이동하곤 했죠.”
무척이나 소란스러운 시대로 기억된다. 철거민들의 한숨 섞인 울음소리와 부동산 투기꾼들의 사나움이 뒤섞였다.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며 다시 떠나는 사람들, 먹을 것이 없다 보니 분양권을 투기꾼에게 팔고 또다시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난무했다.
그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군용천막은 하나둘 사라졌다. 그 자리엔 블록에 슬레이트를 얹은 집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원주민들의 생활 또한 달라지기 시작했다. 초가집을 헐고 블록 위에 슬레이트 지붕을 올렸다.
박봉원 씨는 성남에서 나고 자랐다. 고조부 때부터 약 200년 동안 대를 이으며 살아온 터를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토박이다.
‘광주군 돌마면 하대원리 111번지’라는 주소가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중학교 때 전기가 들어왔고, 그 너머의 기억엔 미군들이 하대원 들과 밭에 와서 포사격 연습을 하던 모습이 남아 있다. 광주군에서 경기도 성남시로 승격되면서 ‘광주군 돌마면 하대원리’라는 주소는 ‘경기도 성남시 하대원동’으로 기록된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광주대단지 시절로 인해 성남에서 산다는 게 부끄러울 때도 있었지만, 내 고향 성남이 자랑스럽습니다.”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성남엔 남한산성이 있다. 사통팔달 확충된 교통망과 살기 좋은 경제와 문화가 있다.
취재 윤해인 기자 yoonh110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