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집’을 짓는다 꼼꼼함으로 목공 건축기술 뛰어난 장인으로 평가 우리 고유 건축물의 곡선은 모양이 뛰어난 만큼 공정이 까다롭고 섬세해 타 지역 무형문화재 유치 경쟁 심해… 우리시 무형문화재 관리 필요해 대목장은 원래 궁궐이나 사찰, 가옥과 같은 것을 맡아 짓는 우두머리로서 지을 집의 법식을 정하고 일의 분담과 기법을 지도하는 소임을 맡아 하는 사람으로 요샛말로는 건축가에 견줄 만한 격조 높은 장인에 속한다. 예로부터 목조건축이 발달한 우리나라는 목수에 주어진 벼슬 또한 상당해서 세종때 서울 남대문 재건기록에 의하면 대목의 벼슬이 정5품이었다. “도편수라고도 불리는 대목장(大木匠)의 일은 통나무가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통나무를 점검하여 그 크기와 생김새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이 부여되고 분류되는데, 분류된 통나무는 다듬어지고 인거장(引鋸匠)에게 넘겨져 각재(角材)나 판재(板材)로 켜지게 됩니다. 켜내는 각재나 판재는 대목들의 소용 재목이 되고, 문짝의 살대 등을 깎는 소목(小木)들에게 돌아갑니다. 소목이 가구를 꾸미는 일이라면, 대목(大木)은 건축물을 짓는 일을 합니다.” 장효순(72) 장인은 40여 년 동안 전통 건축물을 복원 신축하는 일을 전승·발전시켜 온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6호 대목장·도편수이다. 장씨가 대목일을 시작한 것은 23세 때. 대목 중의 대목인 부친 故장조웅(98년 작고) 씨를 따라나서면서이다. “전국을 다 돌아다니며 100여 채가 넘는 건물을 지었는데, 주로 사찰의 법당이나 요사채를 짓거나 문화재 복원에 참여했지요.” 그는 인천의 보각선원이나 주문진의 구월사 등 사찰건물을 비롯해 94년에는 경주에 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따라 옛 가옥을 형성하는 사업으로 129동의 가옥을 지었는가 하면 사찰이나 문화재 복원등에도 참여해 대목장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대목장으로서 장씨는 ‘천년의 집’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터를 파고 땅을 다지는 일부터 무엇 하나도 허투로 하는 법이 없는 꼼꼼함으로 목공부분의 건축기술이 뛰어난 장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 그가 한옥을 지을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지붕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짜 넣은 구성물인 ‘공포’라고 했다. “우리 고유의 건축양식인 한옥의 곡선은 그 모양이 뛰어난 만큼 그 하나하나의 공정 역시 까다롭고 섬세합니다. 특히 공포가 많아질수록 곡선의 미가 살아나는 만큼 어려움이 따르는 작업입니다. 휜 듯하지만 바르고, 뻗어나가는 곡선의 미가 살아야 제대로 된 한옥의 멋이 나지요.” 천년의 집을 짓는 대목장 장씨의 보물 1호는 장씨의 부친 장석재 씨가 사용하던 도구들로 대패며 끌, 망치 등이다. 손때가 묻은 이 도구들을 볼 때마다 ‘제대로 일해야 한다’는 아버님의 가르침이 떠오르곤 한다는 장효순 대목장. 그는 대학교에서 현대건축을, 대학원에서 고건축을 전공한 아들(장원희·32)이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기술자로 대를 이어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소개하며 “이 도구들을 물려줄 수 있게 돼서 든든하다”고 했다. 현재 장씨의 작업장은 강원도 강릉 한적한 숲속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을 짓는 데 무슨 작업장이 필요하겠는가라고 생각하겠지만 기본적인 틀을 모두 작업한 뒤 현장으로 운반하기 때문에 최소 천평 이상의 작업장이 필요하다는 장씨의 설명이다. 오늘날에는 사찰이나 개인의 집을 목조로 짓는 것으로 기술의 명맥이 전수돼 오는 형편이지만,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늘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우리의 옛 집들을 지켜내는 무형문화재 장효순 대목장. 그는 최근 다른 시·군에서는 무형문화재 유치에 경쟁이 심한데 강릉도 예외는 아니라고 전하며, 그에 비해 우리 시는 무형문화재에 대한 대우나 관리가 너무나 소홀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요즘 타 지역의 중요문화재의 유치 유혹으로 고민이 많다. “문화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30~40년간의 세월을 한길만 걸으며갈고 닦아서 얻은 경험이 바탕이 되고 쌓여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전통입니다. 우리시도 더 늦기 전에 무형문화재들에 대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정경숙 기자 chung0901@hanmail.net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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