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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역사이야기·도촌동

  • 관리자 | 기사입력 2010/07/26 [18:31]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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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같은사람 '이병철 선생'

마을 앞과 뒤에 하천이 있어 마치 섬처럼 생겨 <섬말>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됐다는 도촌동(島村洞)엔 재미있는 설화가 많다. 

그 중 고성이씨(固成李氏)에 관한 설화가 흥미롭다.

인조반정(1623년) 주역이었던 이괄(李适)이 2등공신이 된 반감과 반역자로 몰린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패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 죄로 조정에서 용(龍)머리라는 곳에 묘를 썼던 이괄의 조부를 부관참시하기 위해 묘를 파헤치니 묘와 연결된 연못에서 물이 계속 나왔다.
 
마침 지나가던 스님이 이곳과 연결된 물구멍이 양평에 있는데 그곳을 막아야만 물이 마른다고 했다. 물구멍을 막자 묘와 연못의 물은 말랐으나 조부의 시신은 없고 발톱과 몸에 비단자락과 실이 엉켜서 발버둥치고 있는 용의 모습을 한 이무기가 있어 죽였는데 이무기의 비늘이 수년간 흘렀다고 한다.

그 후 이괄의 5대조인 이원(李原)의 묘를 비롯해 고조, 증조, 조부의 묘를 부관참시하고 마을 주변에 보초를 세워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는데 섬처럼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해 <섬마을>로 불렸다는 설화가 있다.

또한 매화마을 아파트 3단지 뒤편에 수령이 430여년 된, 땅속 깊이 뿌리내린 큰 그늘을 드리운 느티나무가 있다. 도촌동 임야 3번지 소재로 고성이씨 용간공파 종중산 끝자락이다. 

예부터 죽은 가지라도 가져가면 집안에 우환이 든다는 전설이 있는 나무로 해마다 고사를 지내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 마을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하고 오랜 세월을 견디며 지켜봤을 느티나무, 지켜본다는 건 시간과 마음을 주는 일이다.
 
도촌동을 바로 이웃한 여수동에 그런 느티나무와 같은 사람이 있다. 광주 이씨, 병철 선생이다.

1920년(경신년) 6월에 홍수가 나서 큰 들판이 망가졌고, 선생은 몇 날밤을 걱정하다 가난한 농가에는 세를 받지않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신념하에 중촌보(中村堡)와탄천보(炭川堡) 제방공사를 이근학, 이기영, 홍순석 등의 협력으로 이루게 됐다. 그 후 농민들은 제방 안의 물을 농사에 이용했고, 망가졌던 큰 들이 옥답이 돼 해마다 풍년이 들어 잘살게 됐다. 

그 후 을축년인 1925년, 전국적인 대홍수로 한강 일원 대부분의 마을이 침수됐고 도촌동은 섬처럼 떠 있어 선생의 덕으로 재앙을 예방할 수 있었다.

병자년인 1936년 8월에는 여수리 주민 200여명이 이춘영을 대표로 제방설치 허가를 내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는 일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보(堡)가 바람과 비에 닳고 씻겨 다시 제방수축공사를 하면서 덕을 갖추어 몸소 행하고 사람대하기를 자신과 같이 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한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업적을 추모하고 기리고자 1958년 9월, 제방공사추진위원회에서 송덕비를 세웠다. 

선생의 송덕비는 현재 ‘성남 여수 국민임대주택단지 조성공사’가 한창인 여수동 374번지에 세워져 있다.

도촌동은 조선시대 때 광주군 돌마면 도촌리였고 1973년 7월 1일, 성남시로 승격되면서 도촌동이 됐다.




자료제공|성남문화원
도움말|윤종준 상임연구위원_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조민자 기자 dudlfd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