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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역사이야기·여수동

  • 관리자 | 기사입력 2010/08/25 [00:55]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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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길을 알고 가는 이, 송산 조견 선생과 독립운동가 이시종


선생을 아낀 태조, 친히 벼슬을 내렸으나

‘아라녀리’, ‘ 갈 길을 알고 스스로 찾아가는 사람’이라는 옛말이다. 우리 고장에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 고려
말 충신 송산 조견(1351-1425) 선생과 독립운동가 이시종(李時鍾)이다.

본관이 평양(平壤)인 조견 선생의 이름은 윤(胤)이었으나 고려 멸망 후<견>으로 바꾸고 호를 송산이라 했다. <견>은 견마(犬馬)가 주인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며 <송산>은 산이 움직이지 않고 소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선생은 어려서 출가해 여러 절의 주지를 역임했고 30세가 넘어 환속해 문과에 급제, 안렴사(고려시대의 지방장관)를 지냈다. 조선 개국 1등공신인 조준(趙浚)의 아우인 선생은 이성계의 조선 개국(1392)으로 고려가 멸망하자 두류산(현재 지리산)에 은거하다 청계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선생의 절개와 재능을 아껴 태조가 친히 벼슬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날마다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송도(松都)를 바라보고 통곡했는데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망경봉(望京峯)이라 했다.

태조가 청계산으로 선생을 만나러 갔으나 손을 올려 읍(揖)만 하고 절을 하지 않았다. 태조는 돌아가면서 말채찍으로 땅을 가리키며 “여기서부터 몇 리까지를 조견의 땅으로 삼아 그의 정절을 표창하고자 한다”며 돌집을 지어 주었는데 거절하고 양주(현재 의정부시) 송산으로 자취를 감췄다.

성남시 향토유적 제3호

세종 7년(1425), 75세에 죽음에 이른 선생은 자손들에게 “내 묘표(墓表)에는 반드시 ‘고려 안렴사’만 기록하고 자손들은 새 조정에 벼슬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러나 자손들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조선에서 내린 관직으로 묘표를 세웠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 번개가 벼슬을 쓴 부분에 내리쳐 비석이 동강났고 현재 ‘공지묘(公之墓)’ 세 글자만 남아있다. 

그 후 자손들은 유훈을 지켰고 증손자의 아들 부(溥)가 유언을 어기고 벼슬에 올랐으나 산소에 성묘 갔다 사망했다고 한다.

현재 여수동 산 30번지에 예장된 선생의 묘역은 <성남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됐다.

여수동(麗水洞)은 김윤탁(金允濯)이 마을 앞의 개울이 유난히 맑고 깨끗해 천자문의 금생여수(金生麗水), 두 글자를 따 ‘여수리’라 했다는 설과 조견 선생의 묘를 쓰고부터 흐르는 물결조차 맑고 깨끗하라고 여수리로 불렀다는 설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19세에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돌마면 여수리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시종은 1919년,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세로 일제의 부역과 세금 수탈에 반대해 송파시위에 참가 후 대왕면수서리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동리(洞里)의 이재순 등 100여 명을 규합, 만세운동을 시작해 면사무소에 진입한 이시종은 <조선독립신문>을 꺼내 독립의 당위성을 낭독하고 “오늘까지는 이 면사무소에서 일본을 위하는 일을 보고 있었지만 이제 조선이 독립하게 되어 부역, 세금등은 필요 없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 헌병주재소에 연행된 이시종은 일제에 의해 징역 1년형에 처해졌고 1920년 4월 28일 만기 출옥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지 올해로 100년이다. 민족정신인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으로 새롭게 복원됐다. 후손들이 선조인 조견 선생과 항일 운동가 이시종의 정신을 이어받아 갈 길을 스스로 찾는다면 그 뜻이 온 나라를 밝게 비추지 않을까.


제10회 송산 어린이 백일장 개최
9.6(월) 14:00~17:00 성남시 중원도서관

자료제공|성남문화원 756-1082

도움말|윤종준 상임연구위원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조민자 기자 dudlfdk@hanmail.net